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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202308 #203

By EDITOR'S LETTER

우린 여기까지예요.
이런 말하는 나를 미워하지 말아요.
상투적인 말이지만 다 너를 위해서예요.
너와 더 가면 그 정이, 그 마음이 변질될까 봐 속상해질까 봐 아파질까 봐 
내가 미리 수작을 좀 부린 거예요.
시간이 부쩍 흐르고 나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너도 알게 될 거예요.
내가 왜 먼저 그만하자고 한 건지, 왜 먼저 그 모진 말을 뱉어낸 건지 말이에요.

좋았죠. 좋았어요.
사람 사이 관계를 뭐라 뭐라 규정짓는 걸 원치 않아서 그렇지
서로 교감했고 응원했고 배려했어요.

한 번은 너가 먼저 그만하자고 한 적이 있었죠.
소주잔을 기울이던 너의 말을 잘라내며 내가 잡았죠.
“가지 마. 우린 더 나눌 게 있어. 다시 생각해.”
그 연장된 시간 덕에 너와 나는 분명 얻은 게 있었어요.
서로 비겼다고 해도 될까요.

차가운 마음의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워요.

너와 더 높은 데까지 올라가고 싶었어요.

우린 여기까지예요.
이런 말하는 내가 미워요.

이겸
李兼
Guiom Lee

202308 #202

By EDITOR'S LETTER

요즘 잠을 기절하듯 자요.
책도, 영화도, 유튜브도 보다 만 게 수두룩한데
예전 같으면 궁금해서라도 다 보고 잤는데
이젠 뭐든 미련이 없나 봐요.

옷도 그래요.
한 10년 밤 잠 설치며 열심히 모아둔 것들,
절반 가량 <데이즈드> 팀에게 떠나 보냈어요.
한 장 한 장 작별의 순간을 마주할 땐 울컥하기도 했는데
잡고 싶은 마음까지는 없었어요.

얼굴도요.
눈매는 좀 아꼈는데…
아니에요.
나아지기보다는 달라지는 것에 중점을 두고 새로워지려고요
아파도요.
질척거림 따위 없이요.

이사도 가네요.
‘남들처럼은 안 살 거야’
빈 땅에다 의기양양 차곡차곡 쌓아 올린 집이었는데
찔끔 눈물 정도랄까.
연연하기는커녕 속이 다 시원해요.

멈추고, 비우고, 버리고 또 바꾸고….

삶의 중간쯤에서 알아가고 있어요.
의미가 있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고 나야 깨닫게 된다는 것.

다음은 또 무엇과 누구와 헤어지게 될까요?
이것이 제게 의미가 있었는지 아니었는지 얼마나 쓰라리게 터득하게 될까요?

설레요.
겁나요.
호흡이 빨라요.

오세요.
내색하는 방법조차 잊은 제 공허함 속으로
어서요.

이겸
李兼
Guiom Lee

202307 #201

By EDITOR'S LETTER

친구를 찾는다.
진심으로 나와 함께해 줄 친구를 찾고 있다.
오죽 간절하면 이 가치 있는 지면을 빌려 부탁할까. 이해를 바란다.

노력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10년 전인가. 인터넷 동갑 모임에 참여해 본 적도 있고
친구라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 채 투자도 해봤고 마음이 통하는 것 같은 상대에게 눈에 불을 켜고 우정을 구걸한 적도 있다.

문제는 나다.

오래가지 못한다.
돌이켜보면 초등학생 시절부터 그랬다. 학기마다 친구가 달랐다.
뭔가 지친 느낌이 들면 연락을 끊거나 피했다. 도망 다녔다.
대학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1, 2년 잘 지내던 무리를 떠나 잠적하길 반복했다. 당하는 쪽에서는 별안간이었을 거다.

사회에서는 일과 생활의 경계를 나 스스로 무너뜨렸다.
20대는 그래도 꽤 괜찮았다.
‘패션’이라는 틀 안에서 같은 꿈을 꾼 동지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낮으로 시시덕거렸다. 돈 한 푼 없어도 그저 세상이, 패션계가 온통 별천지였다.

30대에 들어서면서 증상이 발현됐다.
월간지의 특성상 일하다 보면 매달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기 마련인데, 이 사이클 자체가 내 본질에 기가 막히게 잘 맞아떨어졌다. 1월호 친구, 2월호 친구, 3월호 친구···. 과장을 좀 보태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일과 연관된 사람 이외의 관계 맺기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결정타는 30대 중반이었다.
꿈에서조차 꿈꿔 본 적 없던 사업을 시작하면서다.
작정한 게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시작한 것이었으니 처음에는 몰랐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반드시 잃게 된다는 것,
내 편을 택하면 동료의 적이 될 수 있다는 것,
성공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

지금 알고 있는 것의 단 0.1%만이라도 미리 알았다면 절대 시작하지 않았을 것을.

6년이 흘렀다.
지금 곁에 아무도 없다.
오로지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삶은 먼지보다 못한 자국에 불과하다는데, 나 또한 그 찰나에 갇혀 있다. 누구도 구원할 수 없는 헛발질.
너희의 일탈을 함께할 수 없듯 나는 고독이라는 천벌을 받고 있다. 안다.

“왜 이렇게 멍을 때려?”

어제도 이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저 멀리서 친구가 보여서요.’

헛것이다. 아닐 수도 있다. 아니어야 한다.

이겸
李兼
Guiom Lee

202306 #200

By EDITOR'S LETTER

4월 말 시부야의 미츠키 클럽에서 춤을 췄다. 도쿄에 있는 내내 주야장천 우롱하이만 마셨는데, 두현이 모스코뮬을 |
마시는 걸 보고 따라 마셨다. 두현의 춤은 한결같다. 한 손을 살짝 뻗고 어깨를 들썩이며 웨이브를 타는 듯 보이는 데
‘덩실덩실’과 ‘꿀렁꿀렁’의 중간쯤이랄까. 백미는 표정에 있다. 천진난만, 해맑다.
저 생명체에게도 고민이란 게 있을까 싶을 정도로.
클럽 속 빨간 불빛이 난무하는 가운데 10대의 끝자락에 찾은 시부야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도쿄는 어떻게 보면 시간이 멈춘 곳과도 같아 아늑하다.
20년 넘게 흘렀는데도 그때의 그 감정들이 온전하게 맴돈다.
그 말인즉 나는 그때의 나로부터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노력했다. 불행했던 10대의 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처절히 시도했다. 달라지고 싶었고, 다르게 살고 싶었다.
앞을 내다볼 수는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이런 나로 계속 가다가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고독에 빠져
평생 살게 될 거라는 것을. 끔찍했다. 두려웠다. 20년 넘는 시간 하루도 빠짐없이 내내 다짐했고, 움직였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여정이 내 본질에서 탈출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쪽 구석에서 모스코뮬을 홀짝 마시며 두현의 춤을 따라 춰본다. 거울이 없어 잘되는 건지 안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 하나, 두현의 그 방긋한 표정들은 결코 따라가지지가 않는다.
실패했다. 두현의 춤도, 10대의 나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도.
잠수교에서 펼쳐진 루이 비통 쇼에서 흘러나오던 펄 시스터즈의 ‘첫사랑’ 같던
내 10대는 빼도 박도 못한 채 현재진행형이다. 이토록.
200호를 맞은 <데이즈드>는 그래서 10대를 보내고 있는 친구들을 이야기한다.
세상은 바꿀 수 있을지 몰라도 되레 나 자신은 바꾸기 힘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부디 즐길 수 있게 되길 바라며.
아니 최소한 나처럼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는 스스로를 원망하게 되지 않기를 바라며. 간절히.

 

이겸
李兼
Guiom Lee

202305 #199

By EDITOR'S LETTER

글을 죽이게 쓰고 싶었어. 그러려면 많은 걸 겪어야 해. 모두처럼 살면 안 돼. 소수여야 해. 다정해야
해. 별별 이야기가 흐르고 흘러 스스로 감당 못 할 지경이 돼야 해. 죽여주게 쓰는 거, 그게 그냥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어쩌면 단 하나의 꿈이었으니까. 섬뜩하리만큼 술술 읽히면서도 턱 하고 탁
하게 꺽꺽 숨이 막히면서도 뭔가 하나 남는 것. 굳이 뭘 남기겠다고 쓰진 않을 거야. 차라리 아주 통속적인 것만
모아 쉽게 갈 거야. 그게 나니까. 1년 전쯤에 만약 1년 뒤에 다시 이 지면에 뭔가를 써야 한다면 뭘 써야 좋을지
스치듯 고민해 본 적이 있어. 죽이는 글은 뭐가 됐든 어찌 됐든 솔직함이 최우선이어야 맞는 거잖아. 그런데
그렇게 1년이 흘렀는데 어쩌면 이럴 수 있어? 하늘에 계신 님께서 내 소원을 너무도 친절히 다 들어주시기 시작한
거야. 작정하시고 ‘그래 그럼 다 겪어봐라’ 하시는 거야. 물론 예전에도 이런 마음을 먹은 적이 있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글을 잘 쓰게 해주려고 이러시는구나. 그러라고 내게 이런 일을 주시는구나’ 고맙게 생각하곤 했단
거지. 그런데 이번에는 말이야. 그것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법인데 완전히 초월하시더라고. 죽이게 쓰라고
주는 경험인지 죽으라고 주는 경험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비범한 상상이 취미인 나조차 범접할 수도 없을
정도로 ‘어마무시’한 것이 떼를 지어 몰려오기 시작했어. 펄펄 끓는 뜨거운 불구덩이 아니 거센 파도가 치는
물구덩이 아니, 아니. 수천만 개의 바늘이 온몸을 동시에 사정없이 찌른 후 살갗과 내장을 갈기갈기 찢어놓기
시작했어. 그러고는 다시 수천만 개의 바늘이 그 찢어놓은 살갗과 내장을 하나하나 꿰매 붙이기 시작했어. 잠시
숨을 돌릴까 하는 찰나, 다시 수천만 개의 바늘이 왜 상처 없는 부분만 공략해 다시 찢어놓더니 끝나자마자
곧바로 그나마 깨끗한 부분만 골라 꿰매 붙이고, 다시 찢고 꿰매 붙이고 또다시 찢고 꿰매 붙이길 반복 또 반복

또··· 또··· 또···!

숨을 쉰다는 거 눈을 뜬다는 거 입을 벌린다는 거 그거 그렇게나 의미 있는 일, 맞아?
누구라도 좋으니 용하게 글 잘 쓴다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무릎 꿇고 하소연이라도 하려 했어.
“당신도 겪었어요? 당신 글요! 당신 사연요! 당신 그 혼과 육신요! 정말 죽어야 사는 게 맞는 거예요?”
미처, 겨를도 없이 엄마가 아팠어.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더라. 평범해지면 안 되잖아.
병원비를 챙겨 보내며 ‘엄마, 지금은 내가 더 아파’. 내 양심이 제대로 반영된 법적 효력 있는 유서를 쓰고 싶어.
장기를 내줘도 아깝지 않을 내 자식을 갖고 싶어. 단 하루라도 말 통하고 귀엽고 섹시한 데다 패션 좋아하고
외국어 잘하는 너를 만나 떠나고 싶어. 이달 <데이즈드>처럼 열다섯 살로 돌아가
‘아무도 막지 마. 나 이제부터 철저히 남들 다 닦아둔 길만 쏙쏙 골라 걸을 거야’ 다짐하며 인생을 다시 살고 싶어.
엄마 아픈 데 가볼 수 있게 그만 아프고 싶어. 잠깐, 금연과 1일 1식의 고통이 몰려온다. 고작 3일 됐으니 그럴 만도 하지.
잠깐, 돌아와 보니 오늘이 장국영이 떠난 4월 1일이네. 그것도 2023년, 토요일 밤.
2000년 어느 여름날에 도쿄에 온 장국영을 보려고 신주쿠 한복판을 무작정 서성인 적이 있었지.
그림자라도 밟고 싶었던 건 장국영과 리 알렉산더 맥퀸이 다였어. 내가 키우다 놓친 강아지 이름이 뭐더라.
쪽이였다. 쪽이도 보고 싶다, 장국영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글을 죽이게 쓰고 싶어.

고꾸라져도 나란 인간이 살면서 그나마 좁쌀 같은 걸 남겼다면 그게 글이고 싶어.
본능적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껴. 그간 바늘 핑계 대며 많이 놀았어. 부지런해져야 해. 욕심을 내야 해.
생각은 행동으로 옮길 때가 생각인 거란 걸 결코 잊으면 안 돼. 값비싼 지면을 빌려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가식 떨어
미안, 더없이 가증스러워 죄송. 아직 솔직하지 못해서, 솔직할 수 없어서. 글 때문에 죽고 싶지 않아서.

이겸
李兼
Guiom Lee

202304 #198

By EDITOR'S LETTER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이라, 에밀리 디킨슨은 말했다.
고독, 외로움, 은둔, 적막 같은 단어는 어쩌면 자유와 독립, 해방을 낳을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 하나로 스스로를 방치했다. 그렇게 살았다.

위 제목으로 된 그의 책 첫 장을 열면 다음의 시가 가슴을 묵직하게 때린다.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사랑이 참 그렇대. 네 그릇은 어떤 모양이고 얼만큼 담을 수 있겠니? 내 몫은 손톱달 같아서, 너를 담지 못하고, 나처럼 무심한 너일 뿐인데 네가 이기적이라 비난하고 탓한다. 그럼에도 이런 나를 네 그릇에 담아줄 수 있겠니?

에밀리 디킨슨의 고독은 비극이 아닌, 낭만의 한편처럼 들린다. 그가 자초한 슬픔은 살아생전 써내린 2000편이

넘는 시를 모두 흘러 되레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신념을 불러일으키고, 미묘한 감정들을 통달한 뒤 비로소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수 있음을 말한다. 10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현대적이라는 평가를 얻고 있는 간결하고도 건조한 문체는 또 어떤가? 단조로웠던 그의 일생에 반해 죽음과 영원, 이별과 사랑처럼 파격적인 주제를 다룸으로써 이는 상반된 문학적 전개를 이뤘고, 오늘날에도 그의 작품이 더 사랑받는 이유라고 짐작한다. 그에게 하루의 시작은 어땠을까? 매일 밤 죽음이었을까, 환생이었을까, 또는 필멸이었을까.

한편, 마크 로스코에게 가장 큰 영감이 된 책 중에는 니체의 <비극의 탄생>이 있다. 고대 그리스 비극을 그린 명화는 보는 이들을 죽음의 공포에서 구원했다는 설명이 있는데, 비극의 숭고함이 보는 이들의 감정의 골을 해결한다고 주장한다. 마크 로스코는 예술만이 정신적 공허함을 해결한다고 예술적 자기의 행보를 합리화한다. 그의 작품에서 숭고함마저 느껴지는 이유는 인간 본연의 감정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색과 면만의 본질을 담은 다층 형상의 레이어는 ‘무엇을 느끼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또 던진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류이치 사카모토가 7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연초에 그가 마지막으로 발매한 앨범 <12>를 들으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그때도 “살아남은 자는 삶이 무한할 것처럼 마구 써버린다. 그러니 사랑을 해야 한다”라고 또 써버렸다. 어제는 만우절이고, 장국영이 세상을 떠난 날이기도 하다. 어젯밤 우리는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죽음을 말하다 잠이 들었던가. 죽음이 매일 공기 중에 부유하는데, 우리는 누구를 사랑하고, 또 무엇을 포용할 수 있을까.

잔인한 4월의 시작이다.

오유라
Oh Yura

202304 #197

By EDITOR'S LETTER

음험해지고 불안해질 때 그건 언제나 무엇에 대한 반동이다. 그 무엇에 관해 알기를 포기하거나 기피하는 것이다. 음험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은 채 부릅뜨고 볼 수는 없는 것일까. 히스테리처럼 누군가의 안색을 살피고, 자신을 생쥐 취급하며 타인에 의해 잠식되어 잡아먹히기를 기대하는, 기다리는 싹수없는 마조히즘. 그것이 어쩌면 나의 본성인지도 모를 일이다. 전능한 척하다가 전무한 척 꾀피우며 앓아눕는 일. 절대적으로 윤리적인 척 고고한 얼굴을 하다가 갑자기 모든 악덕의 편에 뛰어들어 불경한 윤리적 추문을 즐기는 것. 가족 오락관도 아니고 단지 오락가락. 거지 같은 삶. 그걸 멈춰 세울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은 삶일 텐데. 그거 다 알고 있음. 근데 그냥 두는 것일 뿐.

만취할 만큼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술을 잔뜩 마시고 누웠더니 오한이 온몸을 훑는다. 두 시간 남짓 잠깐 눈을 붙인다. 무슨 꿈이었을까. 두 노래가 같았고, 똑같은 진실을 폭로하는 그런 불쾌한 꿈. 괘씸한 것. 고얀 것. 괴팍한 파스빈더 같은 것.

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스스로 우둔한 프롤레타리아 게이 주인공을 연기하고 또 감독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우아하고 세련된 중간계급 게이가 복권 당첨으로 벼락부자가 된 게이를 등쳐 먹고 버리는, 어쩌면 신파적인 게이 멜로다. 할리우드의 멜로 황제인 더글러스 서크를 사숙한 파스빈더의 작품 가운데 아마 이 영화가 가장 신랄할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파스빈더 식으로 살겠다고 다짐한다. 파스빈더처럼 살아도 좋을 것만 같다. 그는 계급과 사랑, 섹스, 섹슈얼리티를 파고드는 갈등과 불화, 적대를 탐색한다. 단, 정체성에 관한 지루한 농담은 금지. 어떤 의미에서 파스빈더의 지난 영화는 과거로부터 오늘에 날아온 냉정한 야유가 아닐까.

사진가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어느 자리에서
“항문에 손을 넣은 사진과 그릇 속에 카네이션이 담긴 사진 사이에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특유의 태연한 얼굴로. 아마 이 말은 그의 미학적 충동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는 듯하다. 포르노그래피적인 것을 예술이라고 우기기는 쉽다.
쉬워도 너무 쉽다. 그러나 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하며 예술이 휘두르는 밥맛 없는 권위에 저항하는 것은 무정부적인 반항에 그친다.
그러나 메이플소프는 여봐란듯이 그를 성취한다. 그의 가장 중요한 사진 프로젝트라고 할 만한 ‘XY포트폴리오’는 성적 이미지와 꽃의 이미지를
병치한다. 성적인 것과 미적인 것을 등가화 하는 것이다. 메이플소프는 자신의 사진이 포르노그래피의 단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실로
자신의 사진에 극도로 건전한 정물성을 부여한다. 성적인 것과 미적인 것을 등가화하기 위해 둘을 같은 대상으로 나란히 두고 바라보며
호환할 수 있는 것쯤으로 능청스럽게 양식화하는 일.

4월에는 고약한 주제에 사랑스러운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회고전이 열리고, 이를 기념하며 MISBHV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사진을 갖다 박은 티셔츠를 파페치에서 대량 구매했다. 영문 없이 콧속으로 흘러 들어온, 흐릿한 복숭아 냄새가 나는 그의 하얀 배꼽에 코를 푹 박고선.

나의 귀여운 따봉 슬라임아, 우리 그거 나눠 입고 같이 극장에 가자. 못생긴 파스빈더를 만나러.

 

최지웅
Choi Jiwoong

202303 #196

By EDITOR'S LETTER

지금은 그렇지도 않지만 언젠가 이별이 슬퍼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우연히 차이밍량의 <애정만세>를 보았고, 죽고 싶었다.
슬플 땐 눈에 보이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파리행 비행기 안에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나쁜 교육>을 다시 봤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하면
나는 언제나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를 맨 먼저 생각한다. 언제부터일까, 이별 이후엔 그의 영화만을 찾아보겠다고 다짐한 시절이 있다.
그의 영화는 슬픔을 위안해 주기는커녕 이별을 시시하게 만들어버리는 묘한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열광적인 파괴로 끝나는 사랑과 달리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주인공은 사랑의 파괴적인 힘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다문화적 관용의 시대와 동성애 혐오의 시대 사이에 놓인 어떤 역사적
거리와 상관이 있는지도 모른다. 기숙학교에서 질식할 듯한 성적 학대를 당해야 했던 소년과 무력하게 이를 관망해야 했던 다른 소년의 사랑,
그리고 지금은 커밍아웃하고 분방한 삶을 사는 게이 감독과 소설가가 되려는 어느 성전환자 애인 사이에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역정이 겹쳐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짐작한다.

그 목소리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냉담하게 떨리는 이상한 발성. 머리에 커다란 뿔이 솟은 노루의 눈망울처럼 구슬프게 아름다웠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심장에 멍이 들 것처럼 아팠다. 모르는 나라의 민요와 끈적한 블루스와 다 산 사람의 한숨을 한데 섞은 것 같은
앤터니 앤 더 존슨스의 노래를 하필이면 파리에 도착해서, 마음이 무너지기 좋은 깊은 밤에 우연히 다시 들었다. 거의 10년 만에. 밴드의 보컬인
앤터니 헤가티는 암스테르담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열두 살 때 처음 노래를 만들었다고 알려진다. 그의 첫 노래는 짙은 화장을 한 사람들이 거대한
거미에게 저항하는 내용이다. 어른이 되어 뉴욕에 정착한 다음 게이와 트랜스젠더, 무섭고 더러운 유머로 가득한 피라미드 클럽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가 보이 조지와 루 리드, 앤 드뮐미스터의 광팬이란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나는 그를 더 사랑하게 된 셈이다. 사람이 얼마나 아픈 일을 겪으면,
그걸 다 견뎌냈으면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한참 생각했다. 그의 노래를 듣다가 파리 길바닥에서 그냥 콱 죽어버려도 좋을 것 같다.
그런 마음이 든다. 이상 그냥 다 헛소리.

파리의 작은 호텔 방에 앉아 쫓기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새로운 시즌을 선도할 컬렉션을 쫓아 다니며 하품하거나 눈을 뜬 채 졸거나 혀를 차거나 저 재능과 끼는 뭔가 싶어 배가 아파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되거나 번뜩이는 순간을 지나치거나. 패션이 지겨워졌다가 이내 우러러보는 모순을 반복 실행 중이다. 틈틈이 사랑과 혁명에 관한 생각을 하면서. 요지는 간단하다. 나는 사랑과 혁명이 살아야 할 유일한 이유라고 주장한다. 사랑과 혁명은 서로 호환할 수 있는 동일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혁명은 아주 희귀하게 나타나는 사태다. 그러므로 혁명이 부재하다고 해서 절망에 빠질 이유는 없다. 우리는 그것을 평생 만나보지 못한 채 죽을 수 있고, 그렇다고 해서 비루한 삶을 살았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사랑이 희박해 보이는 세계에 살고 있다면 어떨까. 그것은 황량하고 공허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말에 불과할 것이다.
긴 터널도 반드시 끝이 있을 것이라는 맹목의 믿음.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냄새 맡고 싶고 온종일 꽉 껴안은 채 죽은 듯 함께하고 싶은 그리운 당신에게. 에르메스 쇼장으로 향하기 직전, 파리에서.

 

최지웅
Choi Jiwoong

202303 #195

By EDITOR'S LETTER

매달 원고 마감이 늦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고질병이다.
써야 할 양이 절대적으로 많든 적든, 촬영이 많든 적든, 출장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딱 그만큼 마감이 늦는다.
그쯤 되면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 척추를 늘어뜨린 채 가만히 앉아서 생각한다. 사람은 변하지 않아.
어떤 습관은 천성과 같아서 누가 누구를, 무언가가 또 무언가를 달라지게 하거나 나아지게 할 순 없어.
행동은 세상을 인식하는 태도. 행동이 습관이 되는 건 반복 때문이야. 반복을 통해 얻은 나쁜 습관을 못 고치는 건 따지고 보면
마음이 그걸 좋아하기 때문이지. 다시 좋은 습관을 지니려면 또한 고통스러운 반복이 필요한데, 천장 보고 누워 있고 싶은 본능과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싶은 마음은 마감보다 우주보다 힘이 강하니까. 이런 식의 자기 위안에 빠져 있다 보면 환멸을 못 이겨 폭식하거나 구토하고 말 것 같다. 두 가지 반응 다 그다지 세련되지 않은 구식이라는 걸 알지만, 동시에 인간은 완전하지 않고 죄 또한 많다는 괜한 동정심이 깃든다.
용서만이 모든 걸 용서할 수 있다는 하나 마나 한 속 편한 소리나 죽음으로 씻지 못할 죄는 없다는 성인의 말씀?
어휴, 됐다 그래. 다 필요 없어. 꺼져. 지겨워.

그토록 날카로운 날, 살갗에 닿는 바람이 한결 온화해진 이후 창밖을 자주 보는 습관이 생겼다.
특히 밤에. 매일 보는 풍경이어도 매번 달랐다. 어둠의 깊이와 밀도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가 되었고, 나무는 대체로 어떤 사물로, 드물긴 하지만
가끔은 온전한 나무로 보였다. 뜨거운 샤워 후 촉촉한 감촉을 느끼면서 새까만 밤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웬일인지 신경이 부드럽게 풀린다.
한낮의 격한 울분, 두통, 경멸은 흐릿해지고 때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분노를 직면해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라는, 그럴듯한 이성 대신 그런 품위 없고 어리석은 감정이야말로 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답 없는 낙관의 기분마저 든다.
쉬이 잠들지 못한 채 밤에 깨어 있는 시간은 늘었지만 술은 덜 마시게 되었고, 정기적으로 불쑥 치밀어 오르는 절망적인 기분의 시간도
차츰 줄어들었다. 입춘이 지난 며칠 전 밤은 유난히 어두웠다. 창밖의 은행나무 군락은 평소와 다르게 싸늘하고 냉정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밤의 부드러움에 취해 곁에서 서성대기만 하다가, 그러다가 밤이 곧 끝나버리고 말겠군.

푸른 밤에는 주로 영화를 본다. 혼자서. 일본 아방가르드를 대표하는 감독 중 가장 좋아하는 이는 단연 데라야마 슈지다.
그가 1971년에 만든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는 잔뜩 선동적인 제목을 붙인 허무주의에 심취한 철부지 아나키스트의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매번 통렬하다. 먼발치에서 세상을 향해 훈수 두는 것이 아니라 살갗에 바로 닿을 듯이 붙어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에 주목한다. 영화가 끝나갈 즈음 주인공 소년이 성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듯이 카메라를 향해 퍼부어대는 대목에서
쨍한 마음과 태도가 된다. 콜라병에 갇힌 도마뱀!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를 보고 나선 밤. 종로3가 맥도날드 앞에 혼자 홑겹 우비를 입고 서 있는데 와우, 기분 참 야하더라.
비는 억척스러웠고, 살아야겠다는 몸부림과 사라지는 세계가 짬뽕이 되어 질척이는 우주가 약 먹은 것처럼 두둥실.

 

최지웅
Choi Jiwoong

202302 #194

By EDITOR'S LETTER

봄날은 온다

내게는 쉰두 살 먹은 사진가 친구가 있다. 눈이 펄펄 내린 날,
그가 사는 서래마을 대저택에 눌러앉아 늦도록 트러플 새우깡에 펩시 제로를 마셨다.
그가 날 이렇게 바라보더니 그랬다. “넌 기복이 없어서 좋아. 배배 꼬인 게 없잖아.
네 엄마, 아빠가 널 아주 많이 사랑해서 그럴 거야. 사랑받고 자란 애는 달라. 티가 나.” 어렴풋이 웃고 말았다.
어린 시절 내 얼굴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탓은 아닐는지. 망각은 참으로 편리해. 

이달 인터뷰한 <애프터썬>의 샬럿 웰스 감독이 샹탈 아커만이라는 이름을 말했을 때, 그가 죽기 전에 만든 영화 <저기>를 생각했다. 
이 질식할 듯한 롱테이크가 작렬하는 영화는 오직 블라인드가 드리운 텔아비브 어느 아파트의 바깥과 안의 풍경만으로 이뤄져 있다.
영화의 끝에 이르러서야 관객은 저 멀리 거울에 비친, 그러나 어떤 초점도 없이 나타나는 거무튀튀한 형체로서의 인물,
샹탈 아커만을 보게 된다. 영화를 보며 이 영화가 몇 개의 샷으로 이뤄져 있는지 셈을 하려다 포기해 버렸다.
서른? 아니면 마흔? 아마 그 어느 즈음일까. 모르겠다. 우리는 오직 샹탈 아커만의 얼굴 없는 목소리만을 듣는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자란 그는 단지히에서 이스라엘로 넘어가려다 일자리와 안전이 보장된 브뤼셀로 이주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지중해의 그 도시로 향했다. 그는 가만히 앉아 자살을 선택한 고모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반유대주의에 관한 책을 읽고 히브리어를 떠올리며 하염없는 무력감을 고백하고,
집 근처에서 벌어진 살인 테러에 관해 말한다. 이 영화는 어떤 초점도 없는 디지털 캠코더로 대상을 기록한다.
초점 없는 흐릿한 눈길. 관객은 블라인드를 통해 비친 평평하고 밋밋한 화면의 어떤 귀퉁이에서
차를 마시거나 화초에 물을 주거나 하는 인물을 찾아보고 잠시 그곳에 시선을 집중한다.
이 초점 없는 화면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 영화를 보며 나는 내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졸음과의 혈투를 벌이며 답을 찾으려 했다. 모르겠다. 

아무튼 우울증이라는 구덩이에 빠진 젊은 아빠와 어린 딸의 짧은 여름휴가를 캠코더로 간직한 <애프터썬>의 햇빛과 뒷모습, 
어떤 디졸브는 마치 거울을 보듯 민망하고 아파서 눈물조차 나질 않았다. 
나 역시 “Don’t trust over thirties” 어쩌구 하며 서른을 넘기 전에 사라질 것처럼 공언하던 때가 있었다.
자살을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서른 뒤의 삶은 기생일 뿐이라는, 그래서 죽음과 진배없는 삶일 것이라는
자기 자신을 향한 몹쓸 저주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젠 서른도 그 끝자락에 와 있다.
맙소사, 그런데도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으며 삶을 돋울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접지 않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내게 아이가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고, 원통해진다.
난 아마 그 아이를 키우며 제 삶을 키웠을 것이다. 늙은 자들은 그렇게 삶을 연명하는 것 같다.
그토록 몇 년간 아이를 기르고 싶어 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바쁘다는 말로는 부족한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 쓰라는 원고는 단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어영부영 취해 소파에 누워 
<일타 스캔들>과 <대행사>를 필두로 한 밀린 드라마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때,
5년 전 일기가 적힌 새벽 문자 한 통을 받고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다가 냉장고 속 청하를 탄산수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다. 

5년 전 일기는 아래와 같다. 
“집으로 가는 취한 택시에서 무턱대고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이태원 영이네에 마주 앉아 꼬막을 주워 먹었다.
잠깐이었지만 나는 그를 사랑했던 것 같다. 제대로 된 이별을 고하지 못하고 뒷걸음질 친 건 그의 고통을 마주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머지않아 심하게 망가져 주저앉을 것이다. 그리고 단단하겠지. 나는 그날만을 기다린다.”

이어진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5년 전 형의 예언인데 형이 보기에 지금 나 어때? 심하게 망가진 것 같아?
내가 보니까 망가진 것 같기도 한데, 망가진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 형은 알 것 같아서.
나는 요즘 화가 많이 나는데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어. 가슴이 막 갑갑하네. 아무튼 그래. 
따뜻한 봄 되면 밥 먹자. 지금 말고.”

내 예언은 단 한 번도 들어맞은 적이 없으니까. 
감정이 달라지는 건 당혹스럽지만, 그 마음만은 정직하다. 어떤 것에 대한 애정은 갑자기 피어나고 또 사라지기도 한다. 
2월 어느 날, 이제 겨울은 완전히 끝났다고 느끼는 것처럼. 그게 뭐라고 좋은 마음을 먹는다. 

 

최지웅
Choi Jiwo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