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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201807 #123

By EDITOR'S LETTER

2019

세계적으로 남성복 패션위크가 한창 열리는 중입니다. 2019년도 S/S 컬렉션입니다.
2019년, 실질적으로 그 숫자를 맞닥뜨리기에는 6개월이나 남았지만 벌써부터 경건해집니다.

1999년이 2000년을 코앞에 둔 세기말의 불안감을 억지로라도 즐기게 했다면, 2019년은 ‘벅차긴 한데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나는 과연 2020년을 버틸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라는 스스로의 존재에 관한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2000년과는 감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2020년은, 인류 모두가 어린 시절부터 한 번쯤 그려본 ‘초’미래적인 시기가 될 테니까 말입니다.

2000년과 2020년이 뭐가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는 오늘 아침, 보테가 베네타의 이메일을 보고 한결 더 와닿았습니다. 2001년부터 17년여 동안 보테가 베네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약한 토마스 마이어가 떠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토마스 마이어를 조금 더 근거리에서 만날 기회는 에디터로서 두세 차례 있었습니다. 5년 전쯤 중국 상하이에 보테가 베네타의 플래그십 스토어 오프닝 행사가 열린 날이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모인 프레스와 토마스 마이어의 디너가 있던 저녁, 한 가지 지령이 떨어집니다.
“그와 사진은 찍지 말아주세요. 혹여 몰래 찍더라도 소셜 네트워크에 올리지 말아주세요.”
우리는 대다수, 이 부탁 아닌 부탁을 이해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대중에게 보일 자신 모습의 가이드라인을 잡는다는 것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보고 배워온 우리에게는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유명한 사람과는 반드시 함께 사진을 찍어야 직성이 풀리는 에디터 A의 소셜 네트워크 피드에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이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마이어는 화난 표정이었을까요? 무표정,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답일 것 같습니다. 약간은 체념한 듯 아니면 허탈한 듯, 표정이 없을 뿐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 런던에서 디자이너 톰 포드를 만나는 이벤트에 취재차 갔습니다. 톰 포드 역시 더하면 더했지 사진을 편히 찍을 수 있는 디자이너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시아 마케팅 디렉터가 속삭입니다.
“웬일인지 모르겠는데 오늘은 사진을 마음대로 찍어준대요. 그러니까 날 따라와봐요.”
네, 그날 저는 톰 포드와 사진을 찍었습니다. 더 좋았던 것은 톰 포드가 거기에 참석한 모든 사람과 사진을 찍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날 전 그에게 선택받은 사람이었습니다.

2000년에서 2019년 사이 저는 사진 찍는 것을 마냥 불편해하던 토마스 마이어와 시대가 변했다고 느꼈는지 몇몇에게는 사진을 허락한 톰 포드 사이를 우왕좌왕하며 살아왔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굉장히 빠르고 다이내믹했으나 그래도 예측 가능한 변화였고, 또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말고의 문제는 남이 아닌 내가 결정하는 것이던 시기, 우리는 그렇게 2000년부터 오늘을 살아왔습니다.

2019년이 가슴 깊이 무겁고도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2020년은 지난 20년과는 달리 한마디로 예측 불가능한 시기가 될 거라는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예측 불가능한 상황의 전조는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급변하고 있는 것 또한 2020년이라는 시기가 상징하는 변화에 대한 중압감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2000년에 태어난 사람들이 물리적 성인이 되는 바로 지금, 1900년대의 가치관은 말 그대로 ‘옛날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아무리 폐쇄적인 인물이라도 과거를 좇는 ‘꼰대’로 비치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네, 2020년은 새롭다는 것으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울 것입니다.

2018년 하반기, 이제 우리에게 남은 숙제는 과거 영광과의 이별에 둔감해져야 하는 일입니다. 아마도 훗날 2000년과 2020년 사이에 머물던, 이 시기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기억될 보테가 베네타의 토마스 마이어를 떠나보내야 하듯 말입니다.

저와 <데이즈드>는 2019년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기차를 타고 북한을 넘어 중국, 러시아를 거쳐 프랑스 파리로 갈 그날을 말입니다. 정정합니다. 2019년을 단지 기다리는 것이 아닌 가장 능동적으로 그 시기를 데려오는 데 앞장서는 존재가 되겠습니다.

결코 한발 앞서 걷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시작된, 바로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여러분, 부디 이 미지의 길에 동참해주십시오. 발맞춰 먼저 갑시다. 그곳을 향해.

201806 #122

By EDITOR'S LETTER

 

P.S
<데이즈드>의 열 살 생일을 맞아 준비한 영화제, 음악회에 함께해주신 모든 독자, 아티스트, 브랜드 관계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나’를 잃지 마세요.

 

 

201805 #121

By EDITOR'S LETTER

10년

2008년 중 기억에 남는 일은 그해 6월 1일, 이브 생 로랑이 타계한 것입니다.
당시 코리아의 창간팀 에디터였던 저는 피에르 베르제의 마음에는 쥐톨만큼도 못 미치겠지만 슬펐습니다. 그날 일이 생생합니다. 오전 11시 반쯤 사무실에서 점심 메뉴를 이야기하던 중 비보를 접했고, 점심을 먹으며 그에 대한 추모의 칼럼을 창간호인 8월호 맨 앞부분에 싣기로 결정했습니다. 편집팀 어느 누구 하나 이견이 없을 정도로 이브 생 로랑은, 그 이름 자체만으로도 패션이었고 창조자였으니까요. 그 칼럼에는 이브 생 로랑의 이런 말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의 스타일은 영원하지만, 유행이란 덧없고 무의미한 것입니다.”

2008년 이브 생 로랑이 타계하기 두 달 전, 코리아는 창간했고 2018년 5월호로 10주년이 되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런던에서 온 라는 젊고 주체적인 성향을 지닌 패션 매거진이
독립성보다는 공동체 의식을 중요시하는 이 땅에서,
게다가 어두운 세력이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던 지난 세월을 거쳐
무려 10년을 버텨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대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수줍게나마 축하를 받고자 커버에도 커버 모델인 아이유의 ‘이’를 살짝 뒤집어 ‘10’이라고 표기했습니다. 하나 된 대한민국을 꿈꾸는 바람에서 ‘데이즈드’ 제호를 한글로 표기한 특집 커버도 만들었고, 북녘 땅에서 가장 가까운 삼부연과 직탕폭포에서 촬영한 패션 화보와 2000년대 초반 평양 시내 모습이 담긴 사진을 비롯해 군데군데 10주년의 흔적을 뿌려놓았습니다. 지난 3년여간 인터뷰한, 오늘날 여러분이
알아두면 좋을 패션 디자이너 36팀을 엮은 부록 ‘Fashion Designers You Need to Know’도 있습니다.
더불어 오프라인 이벤트도 준비했습니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신작 , , 등이 국내 최초로 상영되는 ‘데이즈드 영화제’와 5월 초에는 ‘데이즈드 아카이브 전시’를 겸한 작은 파티도 열 예정입니다. 디지털로는 ‘데이즈드’를 불러주면 운동화를 드리는 ‘콜 미 바이 유어 데이즈드&’ 이벤트도 하고 있습니다.
아, 그중에서도 지난 반년여간 가장 공을 들인 곳이 있습니다. 4월 말 오픈 예정인 의 홈페이지(www.dazedkorea.com) 리뉴얼 작업입니다. 디지털 월드에서 프린트 매거진의 진정한 경쟁력은 홈페이지의 용이성, 확장성에 있다고 봅니다. 용이성에도 애를 썼지만 그중에서도 자랑하고 싶은 것은 이제 홈페이지를 통해 전 세계 어디에서나 코리아를 구입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홈페이지를 마켓화해서 코리아를 디지털에 친근한 상품으로 만드는 데 중점을 둘 예정입니다.

의 창간 10주년 커버 모델인 아이유 역시 올해로 데뷔 10주년입니다. 이제 곧 읽게 되시겠지만, 아이유는 와의 인터뷰에서 본인의 10주년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뭔가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은데, 몇 가지 확신하게 된 것은 있어요. 나는 이럴 때 이렇구나, 이건 잘 변하지 않는 성질이구나, 이 정도는 ‘픽스’로 두어도 되지 않나, 그런 게 좀 생겼어요. 10년, 사실 근데 3년 때나, 8년 때나 크게 다르지는…. ㅎㅎ”

내일이면 대하소설 못지않았던 이번 마감이 끝나지만
다음 날 오전이면 저와 에디터 몇몇은 다음 호 커버를 촬영하러 제주도로 떠납니다.

는 생활입니다.

그럼에도 그저 누군가
“ 10주년 호는 레전드 혹은 갓띵작(명작을 뜻하는 요즘 말)이었어”라고 말해준다면
그 이야기를 한 번이라도 듣는다면 정말 울음이 터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같이 프린트 매거진에 관심이 없는 시대에 말이죠.

는, 네, 맞습니다.
전부입니다.

P.S
그리고 바로 이 다음 페이지, 존경에 마지않는 미디어 CEO 겸 의 공동 창립자이자 UK 발행인, 제퍼슨 핵이 창간 10주년을 맞은 코리아에 쓴 축하 편지가 담겨 있습니다. 런던 컬리지 오브 프린팅(London College of Printing)을 다니던 21세의 학생이, 2001년 라는 도발적인 에디션을 만들어 콘데 나스트와 허스트라는 미국 거대 미디어 회사들이 주도하던 세계 패션 매거진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주역입니다. 더불어 제가 받은 이 선물 같은 편지가 여러분의 기억에도 잠깐이라도 남는 순간이 되길 바랍니다. 죄송합니다. 조울증이 심해 여러분에게 많은 감정을 요구한 이달의 편집장 글이었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201804 #120

By EDITOR'S LETTER

변곡점

3월 초, 패션 위크 참석차 다녀온 프랑스 파리는 흩날리던 눈발만큼이나 뿌옇고 어둑했다.
패션쇼의 자리 구성은 인플루언서의 영향력이 보다 강력해졌다. 특히 아시아 쪽은 정도가 더 심하다. 한마디로 패션 매거진보다 인플루언서의 힘이 더 크다. 유럽에 본거지를 둔 브랜드 본사의 판단도 있겠으나 우리 스스로도 응당 그렇게 여긴다. 당연히 파리 패션 위크의 프런트 로를 장악한 것은 셀레브러티와 인플루언서의 셀피다.
지금의 현실을 마냥 즐길 수만은 없는 이유는, 그저 이런 흐름에 동조 혹은 방관하는 패션 매거진의 안일한 대응 때문이다(나부터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도 그랬다. 불과 3~4년 전, 가만히 있어도 프린트 광고가 끊임없이 들어오던 호황기를 누렸음에도 미래에 대한 예측도, 실천도, 준비도 없었다.

그 결과 현재 패션 매거진의 영향력은 인기 있는 셀레브러티에게 기대지 않는 한 개인 유튜버보다 파급력이 낮을 만큼 눈에 띄게 퇴보하고 있다. 패션 매거진이라는 플랫폼에서 파리 패션 위크를 감상하고 내놓아야 할 콘텐츠는 프런트 로에 앉은 셀레브러티와의 셀피가 아니다. 통찰력 있는 리뷰, 최소한 그런 이야기를 작성할 디지털 친화적인 저널리스트를 육성하는 일이다. 얼마 후 지금의 자리마저 뺏기지 않으려면 젊고 똑똑한 디지털 세대들이 반할 만한 패션 콘텐츠 생산을 위한 노력, 진심과 정성 그리고 현명한 투자가 절실한 시점이다.

파리에서 마주한 백화점을 비롯한 편집매장 등 오프라인 패션 숍의 현실도 패션 매거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최신의 패션 아이템을 파리에서 사던 시절은 완벽하게 끝난 듯 보였다. 어 콜드 월, GMBH, 정연찬 등 2018년 LVMH 어워드 쇼트리스트에 속한 20팀을 비롯해 요즘 밀레니얼 세대들이 구입하고자 하는 브랜드나 아이템은 파리의 오프라인, 그 어디에도 팔지 않는다. 주문하고 하루면 도착하는 이커머스, 온라인 숍이 그들을 앞다퉈 선점했다. 매치스패션닷컴은 자신들이 소개하는 에크하우스 라타 같은 신진 디자이너와 프레스, 바이어의 디너를 주선하며 밀레니얼 세대에게 어필하기 위해 급진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다. 이번 서울 패션 위크에도 찰스 제프리를 초대했다.
콧대 높던 하이패션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마이테레사와 프라다, 네타포르테와 발렌시아가 등 이커머스 숍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익스클루시브 라인의 출시는 이젠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다. 꼿꼿하던 샤넬 또한 파페치와 모바일 앱을 출시할 예정이다. 그나마 파리의 오프라인에서 젊은이에게 위상을 발휘하는 것은 슈프림 정도다. 몇 배가 더 뛴 가격으로 리셀되는 몇몇 브랜드의 스니커즈 정도다.

아무리 그래도 오프라인 영업을 포기할 수 없는 전통의 하우스 브랜드는 신진 디자이너를 육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동시에 에디 슬리먼, 리카르도 티시 등 지갑은 두둑하나 이커머스 마켓이 낯선, 이른바 영포티의 감성을 자극할 만한 영웅의
컴백으로 맞설 준비를 하고 있다. 반면 파리의 편집매장은 수동적이다. 마치 명동처럼 고객의 대다수로 보이는 중국인 관광객을 상대하기 위해 중국인 스태프를 고용하는 것뿐이다. 이 도시의 대표적 편집매장이던 꼴레트의 20년 만의 퇴장이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파리는 늙었다. 행여 이 모든 이야기가 한발 앞선다고 생각된다면 당신도 마찬가지다. 늙었다. 변곡점, 2020년이 눈앞이다.

 

 

 

201803 #119

By EDITOR'S LETTER

봄 타령

끝까지 하나의 열망은 소년이고 싶다.

이루어진 것보다 미완의 것,
언제든 어디로든 어떤 형태로든 나아가거나 사라질 수 있는 것,
타인이 아닌 내 목소리에 힘을 실어 행동에 옮길 수 있는 것,
적어도 누군가 만들어놓은 규율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을 만큼의 담대함을 갖는 것,
타락하지 않는 것,
끊임없이 염원하는 것,
숫자를 좇지 않는 것,
한 번 본 영화를 다시 보지 않는 것,
부끄러운 것에 뻔뻔하지 않는 것,
어제에 연연하지 않는 것,
배우려는 자세를 갖는 것,
사람을 사랑하는 것.

완벽하게 시작된 한 해, 결국에는 찾아올 새봄.
물어도 사실 답할 것이 없다.

나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

허락받지 못한 소년의 열망은 끝까지 하나다.

 

 

2018 SPECIAL EDITION

By EDITOR'S LETTER

LOVED

난생처음 찾은 하와이는 듣던 대로 아름다웠다.
한 폭의 그림처럼 자연이 빚어낸
구석구석의 절경은 나를, 너를 그리고 우리를 모두 초연(超然)하게 만들었다.

초연함을 갖는다는 것은 팍팍한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젓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이것을 수준 높은 의식이라고들 하지만, 어찌 보면 별건가.
내 본연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초연함의 초석이 아니겠는가.

태양과 효린의 말과 눈빛,
그리고 행동은 곱고도 단단했고, 따뜻하고도 초연했다.
사랑한다는 것,
자신의 본연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찾은 하와이에서 나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므로 사랑의 결실을 눈앞에 둔 이 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행운이었다.

또 그러므로, 이 특별한 책은 결코 현재 사랑하고 있는 ‘사랑’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사랑을 목도하고 있든,
한 사랑의 과정에서 벗어난 상황이든,
혹은 사랑이 주는 의미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든,
젊은 우리 모두를 위한 사진이고 그림이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위한 선물이다. -장 아누이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단어는 태양과 효린이 직접 자신들의 사랑에 부합하는 의미를 선택한 것입니다.

201802 #118

By EDITOR'S LETTER

I’m not ok, but it’s ok

나는 작은 흔들림에도 크게 예민한 사람이에요.
비행기의 떨림부터 바람에 휘청이는 육교의 진동, 내 옆의 그 사람 심장박동까지,

느껴질 때마다
깨달을 때마다

흔들려요. 불안해요. 겁이 나서 무서워요.
맨 정신이 유약하고 설익은 사람이에요.
나는.

참으로 피곤한 일이기도 해요.
‘사내가 돼서 좀 무디지 못하고.’
유년기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던 내 예민함을 두고 엄마는 엄마답지 않게 말하며 안타까워했어요.

자라면서 나는 살기 위해
‘내 심신의 동요를 티 내지 말자. 내색하지 말자. 들킬 거리를 만들지 말자’ 고 결심했어요.
보통보다 각종 공포증이 많은 그쯤의 아이로,
감정 기복이 조금 심한 그 정도의 아이로
포장됐어요.

그렇게 한참을 봉인된 채 나름을 지속하던 내가
열흘 전부터였던 것 같아요.

더 이상 못 견디겠다, 신호가 왔어요.
아프게 터져 나오며 요동치는 몸서리.

콸콸콸
콱콱콱
쾅쾅쾅

———————————————————

산골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제 내가 나 스스로를 흔들어요.
멈출 수 없어요.
예민해요.

내가 가진 유일한 거예요.

 

201801 #117

By EDITOR'S LETTER

 

共生
2018년 1월호는 사전에 노출됐다.
나 스스로 사방팔방 노출시켰다.
내가 잡지를 처음 시작하던 2003년도 편집장이었다면,
아마 “미쳤냐? 돌았어?” 했을 것이다.
아니다, 나를 죽였겠다.

2000년대 프린트 매거진의 생명은 출간된 뒤 확인할 수 있는 독자의 피드백과 판매 부수였다.
서로 더 잘 팔렸다고 자랑했다. A가 강남 지역에서 더 팔린다고 하면, B는 대형 서점에서 더 팔린다 했고, C는 A와 B는 부록 장사라고 깎아내렸다.
D는 A와 B와 C의 자료는 조작되었다고 했다.
독자의 피드백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에디터에게 백화점 매장에 전화를 돌리라고 했다. “저 A 잡지에 실린 제품 보고 전화했는데, 그 상품 살 수 있나요?”
B는 독자를 명예 에디터로 뽑고, 그들의 의견을 매주 1회씩 청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C는 브랜드와 독자가 함께하는 특별 이벤트를 끊임없이 개최했다.
D는 B와 C의 독자가 겹친다고,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했다. 사전에 책 내용이 노출된다면 그 호는 팔리지 않는 것이었다.
누가 더 철통 보안을 하느냐, 그것이 자존심 싸움이었다.

당시 나는 주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물론 나름 매너 있게.
              1. 촬영을 마친 연예인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편집장님이 다 사진을 직접 셀렉하셔서요. 책을 통해 확인하셔야 해요. 제가 꼭 이 사진이 좋았다는 말씀은 잘 전달해드리겠습니다.”
              1. 잡지에 실린 모델 사진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리려는 매니저에게,
“발간하고 최소 2주일 뒤에 업로드하셔야 해요. 독자들이 책을 구입할 시간은 줘야 해서요.”
              1. 유가 화보(브랜드에서 비용을 지불하고 콘텐츠를 만든 화보) 담당자에게,
“저도 정말 보여드리고 싶은데… 제가 편집장님 몰래 일부 내용만 발췌해서 드릴게요. 걸리면 저 진짜 혼나요. 이해하시죠?”
              1. 그 담당자가 A 매거진은 다 보여줬다며 더 보여달라고 할 때,
“알아요, 그런데 아시죠? 저희는 A 매거진보다 엄격해서요. 저 정말 잘려요. 죄송합니다.”

프린트 매거진을 비롯한 미디어의 환경은 2010년대 초반 홈페이지와 어플 제작에 열 올리던 프린트 매거진의 과도기를 지나
2015년을 전후로, 소셜 네트워크와 더불어 디지털이라는 무형의 플랫폼 소용돌이 속에서 급격하게 변화했다. 누구나 다 아는,
입만 아픈 이 3년여의 태풍 같은 시기를 거치며 프린트 매거진이 살아남기 위해 찾은 답은 간단명료했다.

팔로워 수에 목매달기.
매거진의 팔로워 수를 늘릴 만한 기회가 되는 콘텐츠에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
발간 전 비밀? 사치이고 객기이며 꼰대 같은 소리다.
얼마든지 상의하고 논의할 테니
또 촬영을 해준다면야.
또 콘텐츠를 제작해준다면야.
자신들의 소셜 네트워크에 업로드해준다면야.
그런데 이상했다. 툭 터놓고 오픈하며 공유하는 새로운 아젠다와 결합된 프린트 매거진의 ‘팔로워 수 늘리기’에 여러 부작용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누구나 쉽게 하는 말,
“누가 요새 프린트 매거진에 광고해요. 당연히 저희도 안 하죠.”
또 누구나 쉽게 듣는 말,
“XXX 매거진, 없어질지 모른다더라(프린트는 접고 디지털만 한다는 식의).”

존재감이 없는데 영향력을 논하는 난센스가 지속되고, 아침에는 X가, 점심에는 Y가, 저녁에는 Z가 좋다는 변별력 없이
피로한 업로드가 이어지며, 팔로워 수에 대한 온갖 의심과 검증이 난무하기까지.

2017년 말, 이제는 모두가 묻는다.

과연, 그것이 진정한 프린트 매거진의 디지털인가?
과연, 그것이 진정 프린트 매거진이 가야 할 길인가?
이것이 프린트 매거진을 살리는 길인가, 죽이는 길인가?

비밀의 희생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른 프린트 매거진에 진정한 디지털은 다시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찾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공생할 수 있습니까?
희생할 수 있습니까?

프린트 매거진의 서비스 정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진짜 디지털.
2018년, 그것(만)을 찾겠다.

 

 

201712 #116

By EDITOR'S LETTER

“11월호가 너무 두꺼운 것 아닌가요?”
다른 매체에서 이직한 팀원이 물었습니다.

“뭐예요? 돈 잘 버는 ooo매거진도 이렇게 두껍지는 않아요.”
늘 저를 걱정해주는 브랜드 담당자도 말했고요.

스스로 자신에게도 물어봤습니다. 대답은 이렇게 하고 싶었어요.
“광고가 많아서요!”
그런데 그건 아니니까요. 대답을 잘못했어요.
그러면서 내심, 12월호는 좀 줄여야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아뿔싸,
하다 보니 12월호는 296페이지(11월호보다도 40페이지 더 많은)가 되어버렸습니다.

비록 부록은 없지만, 올 한 해 <데이즈드> 코리아를 사랑해주신 여러분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그리고
콘텐츠에 성수기, 비수기가 따로 있는 건 아니잖아요.
11월, 12월호라고 책값이 싸지는 것도 아니고요.

더불어 전,
수완이 없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겁 없는 편집장과
철없는 발행인이
공존하는
자학적 카타르시스를 제대로 즐길 줄은 아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이 책을 구입하신 모든 독자 여러분.

2018년,
더 잘할게요.
언제 사도 꽉 차고 두툼한 패션 매거진답게요.

 

201711 #115

By EDITOR'S LETTER

<데이즈드&컨퓨즈드> 한국판의 편집부는 인큐베이팅 중이다.

전 세계 패션 매거진의 현주소를 한마디로 말하면 혼돈이다. 100년을 넘게 고고하게 쌓아온 미국발 메이저
패션 매거진의 틀이 1990년대 이후 태어난 새로운 패션 세대 앞에서 맥을 못 펴는 형국이다. 패션 브랜드도,
컬렉션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역사, 헤리티지, 아카이브… 다 ‘흥’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신들을 여전히 우러러봐주며 부와 명예를 쌓은 30, 40대만 마냥 바라볼 수는 없다.
세상의 주류는 젊다 못해 어려져만 간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중문화계를 주름잡던 20대 중반은 이제
베테랑 축에 속한다. 현재 세계 대중문화를 주도하는 스토리 나 등은 10대 초반의
인물이 주인공이다. 그전 <디즈니>나 <해리포터> 시리즈가 어린 자식을 달래기 위한,
결국 부모 세대를 위한 오락물이었다면 요즘의 판도는 전혀 다르다. 기성세대는 감히 범접할 수도 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쌓은 디지털 네트워크로 10대들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정교하고 강하다. 무시해서도,
외면당해서도 안 된다. 인정받아야 한다.

국내 패션 매거진의 시장은 더 혼돈이다. 기술에 유난히 예민한 우리 민족은 종이를 볼 인내력보다는 디지털이
주는 편의성을 택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전 세계 패션 매거진 시장 역시 메이저 매거진의 붕괴와 더불어
도약하는 신규 매거진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한국 패션 매거진에는 글로벌한 패션 특종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나마 아시아에 배정된 특종은 중국 매거진의 몫이다. 일본은 패션계에서는 탈아시아다.
세계 패션계가 한국 패션 매거진에 돈을 쓰는 경우는 하나다. 연예인.

<데이즈드&컨퓨즈드>의 정체성은 패션 매거진이라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Fashion Together.’ 패션은 혼자
할 수 없다. 제대로 된 에디터가 필요하다. 현재 한국 패션 매거진이 처한 현실을 이해 및 극복하고 내일을
도약할 수 있는, 기존과는 확실히 다른 에디터여야 한다.

시대적 키워드인 다양성과 독립성의 반대말은 편협함과 의존성이 아닌 ‘늙음’이다. 늙은 매거진은 패션
매거진이 될 수 없다. 끊임없이 실험할 것이다.

<데이즈드&컨퓨즈드> 한국판의 편집부는 인큐베이팅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