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곡점

3월 초, 패션 위크 참석차 다녀온 프랑스 파리는 흩날리던 눈발만큼이나 뿌옇고 어둑했다.
패션쇼의 자리 구성은 인플루언서의 영향력이 보다 강력해졌다. 특히 아시아 쪽은 정도가 더 심하다. 한마디로 패션 매거진보다 인플루언서의 힘이 더 크다. 유럽에 본거지를 둔 브랜드 본사의 판단도 있겠으나 우리 스스로도 응당 그렇게 여긴다. 당연히 파리 패션 위크의 프런트 로를 장악한 것은 셀레브러티와 인플루언서의 셀피다.
지금의 현실을 마냥 즐길 수만은 없는 이유는, 그저 이런 흐름에 동조 혹은 방관하는 패션 매거진의 안일한 대응 때문이다(나부터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도 그랬다. 불과 3~4년 전, 가만히 있어도 프린트 광고가 끊임없이 들어오던 호황기를 누렸음에도 미래에 대한 예측도, 실천도, 준비도 없었다.

그 결과 현재 패션 매거진의 영향력은 인기 있는 셀레브러티에게 기대지 않는 한 개인 유튜버보다 파급력이 낮을 만큼 눈에 띄게 퇴보하고 있다. 패션 매거진이라는 플랫폼에서 파리 패션 위크를 감상하고 내놓아야 할 콘텐츠는 프런트 로에 앉은 셀레브러티와의 셀피가 아니다. 통찰력 있는 리뷰, 최소한 그런 이야기를 작성할 디지털 친화적인 저널리스트를 육성하는 일이다. 얼마 후 지금의 자리마저 뺏기지 않으려면 젊고 똑똑한 디지털 세대들이 반할 만한 패션 콘텐츠 생산을 위한 노력, 진심과 정성 그리고 현명한 투자가 절실한 시점이다.

파리에서 마주한 백화점을 비롯한 편집매장 등 오프라인 패션 숍의 현실도 패션 매거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최신의 패션 아이템을 파리에서 사던 시절은 완벽하게 끝난 듯 보였다. 어 콜드 월, GMBH, 정연찬 등 2018년 LVMH 어워드 쇼트리스트에 속한 20팀을 비롯해 요즘 밀레니얼 세대들이 구입하고자 하는 브랜드나 아이템은 파리의 오프라인, 그 어디에도 팔지 않는다. 주문하고 하루면 도착하는 이커머스, 온라인 숍이 그들을 앞다퉈 선점했다. 매치스패션닷컴은 자신들이 소개하는 에크하우스 라타 같은 신진 디자이너와 프레스, 바이어의 디너를 주선하며 밀레니얼 세대에게 어필하기 위해 급진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다. 이번 서울 패션 위크에도 찰스 제프리를 초대했다.
콧대 높던 하이패션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마이테레사와 프라다, 네타포르테와 발렌시아가 등 이커머스 숍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익스클루시브 라인의 출시는 이젠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다. 꼿꼿하던 샤넬 또한 파페치와 모바일 앱을 출시할 예정이다. 그나마 파리의 오프라인에서 젊은이에게 위상을 발휘하는 것은 슈프림 정도다. 몇 배가 더 뛴 가격으로 리셀되는 몇몇 브랜드의 스니커즈 정도다.

아무리 그래도 오프라인 영업을 포기할 수 없는 전통의 하우스 브랜드는 신진 디자이너를 육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동시에 에디 슬리먼, 리카르도 티시 등 지갑은 두둑하나 이커머스 마켓이 낯선, 이른바 영포티의 감성을 자극할 만한 영웅의
컴백으로 맞설 준비를 하고 있다. 반면 파리의 편집매장은 수동적이다. 마치 명동처럼 고객의 대다수로 보이는 중국인 관광객을 상대하기 위해 중국인 스태프를 고용하는 것뿐이다. 이 도시의 대표적 편집매장이던 꼴레트의 20년 만의 퇴장이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파리는 늙었다. 행여 이 모든 이야기가 한발 앞선다고 생각된다면 당신도 마찬가지다. 늙었다. 변곡점, 2020년이 눈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