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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201911 #143

By EDITOR'S LETTER

현대사회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획일화다.
같은 성, 같은 국적, 같은 고향, 같은 이념 등으로 사람의 본질을 구분하고 편을 가르는 것처럼 위험하고 비겁한 일은 없다.
이미 세상은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인정한 지 오래됐다. 오히려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 매력을 느끼고 부러워하는 정서가 팽배하다.
그것을 혐오하거나 폄하하는 것은 자신의 미천한 수준을 드러낼 뿐이다.

반면 우리나라 사회는 다양성을 상실했다. 다양성을 밑거름 삼아야 단단하게 피어날 수 있는 개방성과 팽창성도 사라졌다.
평등은 평범으로 전락했고, 나와 의견이 다르면 적이 된다. 개인의 인권과 독립성을 가장 중시해야 할 진보적 가치는 그 어디에도 없다.
국민적 합의, 또 이런 구차한 말을 들먹이며 성차별 금지법 하나 요즘 바이브로 개정해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식 나이 계산법의 문제점은 즐비한 데 관심조차 없다. 또다시 다수결 중심의 여론조사 판이 됐다.

그리고, 지겹지도 않나 보다. 20세기 난무하던 도덕과 정의를 묻는다. 굉장히 고리타분하고 비열한 마녀사냥 방식으로. 그 잣대는 실로 보잘것없다.
누가 ‘덜 더럽냐’ 혹은 누가 ‘더 깨끗하냐’, 이 정도 차이인데 그 심판을 철 지난 감성의 언론이 주도하고 있다.
그 언론 위아래로는 분배에 충실하면서 선진국으로 가는 이론에 능하다는 적당히 부패한 선생들이 기득권을 꽉 쥔 채 자리를 놓지 않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그 엉덩이가 참으로 둔하고 더러워 그나마 의식 있는 자 중에 그들이 사라진다 한들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터놓고, 지금 20세기 도덕이 그리도 중요한가?

‘뜻밖의’ 생각을 갖고도 나라 밖을 나가 서 있기조차 어려운 게 현실인데, ‘다양한’ 생각조차 갈 곳이 없다.
세상이 아주 조금이라도 변할 줄 알았는데, 세력만 변했다.
깨라고, 열라고, 더 다양해지라고, 늦더라도 앞으로 가라고, 그래서 정말 다른 걸 하라고, 울부짖어야 하는데
자리 눈치만 보고 그 반대로만 가니 싹이 트지 못하고 열매는 바닥에 깨진다. 망자에게 위로의 말조차 꺼내기 겁나는 뼈 아픈 나날이다.

+
이번 판권에부터 보이지 않는 패션 에디터 이종현은 가 지금까지 존재하고
서울 성수동에 아늑한 터전을 자리 잡아 스무 명이 넘는 팀이 생겨나고,
또 넓게 보면 차이나가 론칭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지난 4년, 그가 에 쏟은 20대의 시간이 새로 시작하는 30대의 앞날에
마치 그가 좋아하는 피겨들처럼 ‘피식’ 웃을 수 있는 추억이 되길 희망한다.
불과 3일 차이 나는 생일을 갖고 딱 열 살 차이 나는 너이기에 군소리를 덧붙였다.

201910 #142

By EDITOR'S LETTER

 

 

 

흰 장미 속 아이유 커버를 보셨나요?
이제 다채로운 색의 장미를 보실 차례입니다.
세상에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주는 가치를 잊지 마세요.
의 가을, 겨울 특집호 또한 루틴을 벗어난 그중 하나일 것입니다. 안 되는 것은 없습니다.
뎀나 바잘리아는 발렌시아가 쇼장 안에서 포토 부스를 과감히 없애버렸고(덕분에 모두가 프런트 로에 앉게 됐죠.
사진가들은 백스테이지 안에 따로 자리를 마련했고요), 버질 아블로는 쿨하게 세 달간 휴가를 내버렸잖아요.
한 번 더 이야기하는데 ‘안 된다’고 말하지 마세요.
다 됩니다. 부딪혀보자고요.
우리가 얼마나 젊은데요. 아니 어린데 말입니다.

 

 

 

201910 #141

By EDITOR'S LETTER

Declare Independence.

<데이즈드> 독자라면 누구나 알 법한 이 문장은 매달 커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데이즈드>의 표어와도 같다. 예전에 비요크의 노래 중 동명의 곡이 있었다. 비요크의 6집 앨범 중 세 번째 싱글곡으로, 덴마크의 식민지로 남아 독립을 준비 중인 그린란드와 페로스제도의 독립을 촉구하는 헌정곡이다. 그녀와 여러 차례 작업한 미셸 공드리 감독이 뮤직비디오를 연출해 화제가 됐다. 이 곡이 본의 아니게 더 이슈가 된 것은 2008년 3월, 중국 상하이 공연에서 비요크가 이 노래를 부른 후 “티베트, 티베트!”라고 외치며 달라이라마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Declare independence
Don’t let them do that to you
Declare independence
Don’t let them do that to you

반복되는 이 가사는 사실 독립을 염원하는 한 국가뿐 아니라 현대 시민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특히나 우리나라처럼 다수의 의견을 중시하고, 자신보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살아가야 할 때가 많으며,
심지어 결혼은 개인이 아닌 가족의 연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정도인 곳이라면 더더욱.

참 기가 막히게도 내가 <데이즈드>를 맡기 전 <데이즈드>의 표어는 ‘Be the First to Know’였다. 2015년 10월호 이전 <데이즈드>를 갖고 있는 독자라면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던 시대에서 개인의 독립성을 중요시하는 시대로,
그렇게 <데이즈드>의 방점 또한 달라진 것이다.

‘2010년대’라는 시간으로 나올 <데이즈드>도 이제 몇 권 남지 않았다. 미지의 세계인 2020년대를 목전에 두고 관계와 독립성을 고민하는 내게 도움이 된 것은 1991년 영화 <조니 스웨이드Johnny Suede>였다. 브래드 피트의 첫 상업 영화인 이 작품에서 음악가를 꿈꾸는 그는 친구의 조언에 이렇게 대꾸한다. “시대라는 건 어차피 금방 지나가잖아. 내 음악은 언제 어디서든 나와. 시대가 따로 없어.” 하기야 “내가 원하는 걸 다 가지면 당신은 필요 없다”라는 가사를 흥얼거리는 20대의 조니 스웨이드(브래드 피트), 즉 청춘만이 가능한 자존심에 풍류를 더한 미학.
틀리면서 동시에 맞는 말이다. 시대는 어차피 금방 지나간다.

이 영화에는 가수이자 영화배우이며 작가인 닉 케이브Nick Cave도 등장한다. 조니 스웨이드가 동경하는 뮤지션 프레이크 스톰Freak Stom 역이다. 닉 케이브가 누구인가. 밴드 ‘Birthday Party’를 비롯해 ‘Nick Cave & the Bad Seeds’을 통해 마치 프랑켄슈타인이 분노와 슬픔을 느낄 법한 울부짖음에 가까운 고딕 록 사운드로 유명한 뮤지션이자 소설 <버니먼로의 죽음>에서 느껴지는 혐오와 동정을 창조한 자신만의 천재성을 처연하게 확장하고 있는 시대의 아티스트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이달 <데이즈드> 영국판 커버가 닉 케이브의 아들, 얼 케이브Earl Cave다. 갑자기 나이가 궁금해 찾아봤더니 닉 케이브는 1957년생, 얼 케이브는 2000년생. 그러니까 닉 케이브가 40대 중반에 낳은 금쪽같은 아들인 셈이다. 얼 케이브의 인스타그램을 둘러보니 1991년도 영화 <조니 스웨이드> 속, 그러니까 30대 초반 닉 케이브와 판박이다. 업로드한 사진이나 글도 비범하다. 피는 못 속인다. 얼 케이브는 구찌 행사에도 초대받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2006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구찌상을 받은 적이 있다.

이 무슨 횡설수설이란 말인가. 추석을 하루 앞둔 채 마감하겠다고 사무실에 나와 이것저것 쓰다 보면 논점이 올곧을 수만은 없는 법이다.
결국 나는 누구보다 독립적으로 내 길을 갈 거고, 현재뿐 아니라 어떤 고전을 통해서든 영감을 받아 성장할 거고, 무엇보다 그 끝에 나를 이을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낼 거다. 그리고 나는 결코 <데이즈드>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내 창작물을 언제 어디서든 나오게 만들 거고, 그것은 시대가 따로 없을 것이다. 회전의자를 360도로 여러 번 돌리고 돌린 끝에 나온
2019년 9월 12일의 결론이다.

201909 #140

By EDITOR'S LETTER

 

 

 

어릴 때는 복싱을 많이 봤다.

아, 권투.

TV 채널에 대한 주도권이 아빠에게 있고, 아니 아빠 탓도 아니고,
주말 저녁이면 온 가족이 알루미늄 원형 밥상에 둘러앉아 권투를 보는 것이 다수의 일상이었다.
홍수환 선수까지는 기억이 안 나고 장정구, 유명우 시대는 정통으로 기억난다.
당시 권투는 정말 거칠었고, 요즘 말로 리얼했다.
KO 게임이 아닌 이상 2시간 남짓 12라운드까지 기본으로 뛰었는데,
상처로 얼룩진 얼굴과 온몸엔 피와 땀이 흥건했다.
김치찌개에 콩자반을 정신없이 입속에 넣어가며 권투 경기를 보다 보면
달걀 프라이 노른자나 줄줄이 비엔나 따위는 못 먹어도 그만이었다.
장정구와 유명우의 매치가 성사되길 기도한다거나 혹은 누구를 응원한다거나 행여 어떤 쾌감을 느껴서는 아니었다.
어린 마음에 스포츠보다는 싸움에 가까운 그것이 그저 무서웠다.
챔피언이 타이틀을 유지하든 도전자가 그것을 뺏든, 큰 버클이 달린 벨트를 둘러싼 그들의 싸움에 겁이 났다.
눈을 질끈 감긴 했어도 그 권투를 제발 보지 않으면 안 되냐고 말할 용기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두려웠다.

세상은, 사회는, 어른은,
부디 그 사각 링 안에 존재하지 않기를.

볼록한 브라운관 앞을 아무리 도망치고 싶었다 한들
설사 그것이 찬 없이 물에 말아 먹는 보리밥이라고 해도
알루미늄 밥상이 선사하는 안정의 유혹을 이겨낼 만큼은 아니었다.

세상은, 사회는, 어른은
부디 이런 딜레마에 빠지지 않게 하기를.

나도 모르게 지금 눈을 감고 키보드를 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그때처럼, 눈을 질끈 감은 채 권투 경기 소리를 들어가며
물에 만 밥을 흡입하던 아홉 살 소년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입은 또 떡하니 벌어진다.
포만감은 영영 네 것이다.

 

 

 

201908 #139

By EDITOR'S LETTER

 

 

 

구나 그렇듯 어린 시절 일기를 거르지 않고 썼다.
당시 일기를 관통하는 법칙이 하나 있었는데, 학년이 올라가고 선생님이 바뀌어도 늘 당부하신 것이 ‘오늘은’이란 말로 시작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예컨대 ‘오늘은 아무개를 만나 놀이동산에 갔다’고 시작하는 것은 이미 그날 일기이므로 의미 없는 중복에 불과하다는 말이었다.
난 규칙을 꽤나 잘 지키는 학생이었다.
행여라도 습관적으로 ‘오늘은’을 더하면 그 자국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우고 또 지웠다.

기자를 시작하면서 편집장과 선배들 그리고 또 교정사에게 배운 것은 구어체와 문어체의 차이였다.
쉽게 말하면 말하는 대로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되게’다.
2003년 당시 ‘되게’가 표준어였는지 아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기자라면 ‘되게’보다는 ‘무척’이나 ‘매우’라는 부사를 쓰는 게 더 나은 표현이라고 배웠다.
나는 그 뒤로 내가 쓰는 기사는 물론이며 디렉터 이상이 된 이후에는 기자들의 원고에서 ‘되게’를 지우거나 다른 부사로 바꾸기에 급급했다.
그래, 난 규칙을 잘 지켰다.

지난달 문득 교정사가 검열을 마친 기사에서도 ‘되게’가 발견돼 담당 기자에게 물었다.
“’되게’란 표현은 좀 그렇지 않니?”
“아, 요즘 그런 게 어딨어요? 오히려 그렇게 말했으니 그렇게 전달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거죠.”
나는 그 기자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미래를 외치면서 과거에 사로잡힌 모순적이고도 처량한 선배를 향한 멸치 국물처럼 짭짜름하지도 냉랭하지도 않은 뭔가 싸한 그 눈빛.
그리고 ‘정말’ 어제, 문득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데 거의 모든 자막에서 ‘되게’란 낱말이 거침없이 마구 등장했다.

이런, 나는 그깟 ‘되게’도 못 이긴 채 입으로만 반항했던 건가.

이달 나는 전도연과 하현상을 만났다.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인터뷰하면서 깨달은 점은 둘 다 그 무엇을 위해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베테랑의 진가든 청년의 치기든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건 그들의 멋이었고 규칙이었으며 삶을 지탱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헛갈리고 있다.
규칙의 반대말이 꼰대인지, 타협의 반대말이 속물인지, 나의 반대말이 자유인지.  

그래서 지금 나는 결론이 없다.
그저 아직까지는 이달도 모든 원고에서 ‘되게’를 지우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러면서도 일기를 쓸 때 ‘오늘은’으로 시작하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이 글을 정말 한 개인의 얇디얇은 가벼운 깨작거림으로 여기진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이것이 현재의 내 근간을 흔들고, 미래의 나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큼 ‘무척(되게)’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니까.

P.S
컨피덴셜confidential. 작년의 단어가 TMI; Too Much Information이었다면 올해는 컨피덴션이 아닐까요?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모두 다 공유해야 하는 현재 세상이 피곤하지는 않습니까?
진짜 말로만 컨피덴셜하지 말고 서로 좀 은밀하고 감춰서 보관할 만한 것은 가슴속에 묻고 지내는 게 어때요? 그게 보다 미래적인 휴머니즘 아닐까요?

 

 

 

201907 #138

By EDITOR'S LETTER

 

 

 

착하다는 게 무엇인가.
세상 모두가 다 착할 수 있을까.
착하길 강요하는 세상에서 문화가, 예술이 창조될 수 있을까.

패션이든 음악이든 뭐 여튼 예술이라는 영역은 영감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순응보다는 저항에서, 그 대비되는 묘미를 더욱 크게 느낄 수 있다.
미안하지만, 착하고 선하고 좋은 것보다는 못되고 악하고 나쁜 것,
‘good thing’이 아닌 ‘bad thing’에서
사실 예술이라는 것이 영근다.

미래를 왜 로봇이나 반도체 같은 기술에서만 찾으려 하는가.
미래는 문화에 있다.

문화가 언어 이상임을 K-Pop이 증명하고 있고, 문화가 산업 이상임을 한국 영화로 파생되는 수많은 비즈니스를 통해 모두가 체감하고 있다.

패션 쪽은 많이 아쉽다.
디지털 시대에 가장 유용할 수 있는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숫자에 집착했다.
인플루언서의 틀에 갇혔고, 창작보다는 모방으로만 이어졌다.
K-Pop과 한국 영화의 부흥기에 충분히 더 성장할 수 있음에도 여전히 구태의연한 스타 마케팅에 맴돌았다.
물론 세상도 언제나 그렇듯 도와줄 마음조차 없었다.
유일하게, 모델들은 대단했다. 유리창을 깼고, 더 깰 거다.

패션계 종사자로서의 각성과 별개로 착함이 만연한 세상에서 예술적 허용에 대한 인식의 무지함은 격렬하게 아쉬운 부분이다.
예술의 기초가 되는 다양성을 위한 배려의 미학이 존재하지 않음이 슬프고 처량하다.

우리가 지금 만들어놓은 규범이라는 것이 결코 답은 아니다.
마치 남녀칠세부동석처럼 구태의연하고 시대착오적인 것에 둘러싸여 우리 모두 착각하고 사는 것일 수도 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이를 다르게 계산하고, 현재 중국보다 더 유교적 가족주의에 갇혀 있는 것 같지만 이혼율은 엄청나고 출산율은 최저다.

착함을 강요하지 마라.
이 나이에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갖지 마라.
스스로 이 정도는 도덕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허용 범위, 그 잣대의 틀을 깨라. 

예술이 고프다.
대중이 요구하는 ‘착함’의 틀에 갇혀 이 땅에 몇 없는 귀한 천재들이 부디 하향평준화되지 않길 바란다.
개인의 자유가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인 곳이 되어야만 세계를 장악할 만한 예술과 문화가 자라고 미래가 꽃핀다는 것을 확신한다.

 

 

201906 #137

By EDITOR'S LETTER

 

 

 

 

 

T하고 B

T는 언제나 꼿꼿하다. 한국 이름으로 치면 태우정도의 어감이 좋겠다. 아버지가 군인이 아닌지 슬쩍 물은 적도 있다. 옷에는 마땅히 관심 없는 척하지만 나는 T가 쇼윈도에서 자신의 옷매무새를 만지는 모습을 꽤 여러 번 보았다. 언제나 손톱은 정갈하다. T를 알게 된 후 가장 놀란 건 작년 여름 장마 때다. 같이 한잔하고 나오는데 비가 무섭게 쏟아졌다. 머리에 뭐라도 가려볼 양 가방을 추켜 드는데 쏜살처럼 자동차가 지나갔다. 그 찰나, 갑자기 내 손목을 움켜쥔 채 보도 쪽을 향해 잡아 끄는 T의 악력(사실 차보다도 그 힘에 더 놀랐다). 그러더니 , 앞 좀 보고 다녀툭 던진다. 남녀노소 불문 사람을 끄는 매력 하나는 확실하다.

B는 참 상냥하다. 지난주에 B와 동묘 쪽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30분 정도 늦고 휴대폰 배터리도 나가서 난감한 적이 있다. 좀 미안한 마음에 B가 앉아 있는 창가 쪽 자리로 후다닥 뛰어가는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B와 딱 눈이 마주쳤다. 그때 그 B의 눈망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람을 안심시키는 눈망울이랄까. 그러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린다. “미안. 배터리까지 나가서.”내 말이 끝나자마자 오구오구 그랬어요?”란다. B의 입술에 핑크빛이 도는지는 그날 처음 알았다. B의 부모님도 그렇다. 할머니, 할아버지와도 뵙고 닭갈비를 먹은 적이 있는데 정말 다들 인상이 싱글벙글이셨다. 한국 이름으로 치면 보연정도의 어감이면 좋겠다.

그런 TB가 사귀고 있다는 걸 안 것이 바로 어제다. 사무실에 막 출근해 나와 있는데 갑자기 TB가 함께 있는 단톡방이 만들어지더니 T사실 우리 사귀어. 말하려 했는데 깜박함이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거 아닌가. 솔직히 한 3분여? 답을 보내지 못했다. TB, 누구를 이성적으로 생각해 아쉬운 마음이 든 것은 결코 아니다. 우선 각각 따로 알던 TB가 서로 알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고, 나도 모르게 걔네 둘이 같이 뭔가 하고 있는 걸 상상했는데(미친 짓이다) ‘어울려?’ 이 생각이 들어서다. 순간의 장고(?) 끝에 내가 보낸 답은 지금 생각해도 지나치게 정신없다. ‘축하해. 그런데 좀 그렇기도 해. 아니 대체 언제 어떻게 만난 거지? 나한테 좀 말을 해주지. 아니다. 잘 어울려. 축하하고 빨리 날 잡아. , 근대 와다. 진짜, .’

T가 분명 리드했을 것이다. 나하고 오해를 쌓는 것이 싫었을 테니 빨리 나부터 만나자고. 그렇게 해서 잠시 후 바로 이곳에서, T하고 B가 교제하는 줄 알게 된 지 만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함께 만나는 자리가 마련된다. 휴대폰 카메라로 덤덤한 표정을 연습해본다. ‘괜히 뭔가 두근거리는 것 같은 건 뭐지? 첫마디는 뭐라고 꺼내야 하지?’ 정신이 잠깐 아늑해지더니 눈앞에 익숙한 두 얼굴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T하고 B.

그런데 뭐지? 저 표정은?

 

 

 

Editor-In-Chief

이현범 Lee, Hyunbum

201906 #136

By EDITOR'S LETTER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스물아홉 살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구차하게 물리적 나이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따진다면 스스로의 가슴에 손을 얹어라.
거의 매 순간 혹은 때로는 이름보다 먼저 나이를 묻고 기타의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았는지를.
고로, 나는 스물아홉 살이다.

 

황당무계하게 왜 하필 스물아홉 살이냐고 물으면 나는 보다 명확하고 섬세하게 그대에게 답할 수 있음이다.
더구나 수학보다 정의롭다.

 

현재 감지하고 있는 사회적인 내 위치 +
내가 열망하고 갈망하던 것을 이뤄낸 순도 +
필연적으로 펼치고자 하는 국제적인 야망에 대한 실현 가능성의 정도 +
지극히 주관적 잣대로 정의한 경제적 수준 +
다소 어처구니없게 들리게 했지만, 외모와 체력에 관한 세계적 평균치에 따른 기준
= 스물아홉 살

 

그러니까 한국 나이로 1991년생, 스물아홉 살이다.

 

나는 꿈꾼다.

 

여름이 가을 같기를
파도가 구름 같기를
소망이 오늘 같기를
무언이 축사 같기를

 

그리고 또 나는 반항한다.

 

성(性)이 아니길
돈이 아니길
도(道)가 아니길
벗이 아니길

 

 전화가 와서 받았다.
나보다 열 살 많은 한 사람이 가파르게 고통을 토로했다.

 

“자, 이러면 편해질 거예요.
오늘부터 우리 이렇게 해요. 나는 스물아홉 살, 그대는 서른아홉 살.
물어보세요. 그리고 친구해주세요.
나는 지나치게 꿈도, 갈 곳도, 만날 사람도, 해야 할 일도 많은
다정다감한 스물아홉 살 소년이랍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편집장이든 뭐가 됐든 ‘님’은 붙이지 말아주세요.
나는 어디에도 갇히지 않을 거니까요.”

 

스물아홉 살 나는 무척이나 즐겁게 내일을 살 것이다.

 

그는 전화를 끊었다.
마흔아홉 살이다.

201905 #135

By EDITOR'S LETTER

 

 

PRINT IS THE NEW LUXURY

분명 본 책이나 영화인데 본의 아니게 다시 보다 보면 전혀 새로운 줄거리가 된다. 시간의 간격을 두고 내가 처한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나 또한 마찬가지다. 매번 이맘때 쓰던 편집장 글을 같은 모니터와 키보드를 두고 쳐 내려가고 있거늘, 전혀 새롭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의 새 공간, 성수동(연무장길 1)에서 맞이하는 첫 마감이다.

 

디지털과 이커머스가 아무리 무성하다 한들, 아니 무성해지면 질수록 직접 경험이 주는 가치는 높아지기 마련이다. 누구나 인터넷으로 파리 패션위크나 코첼라 공연을 볼 수 있지만 현장에서 주는 번뇌와 쾌락을 어찌 따라올 수 있겠는가. 차원이 다른 것이다. 하루 종일 영상 통화로 서로의 안위를 물으며 안락을 느낀다 한들 직접 만나서 안았을 때에 비한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다. 하루면 도착하는 이커머스 서비스에 새삼스레 놀라긴
하지만 매장에 가서 상품을 직접 보고 입어보며 고민하는 행위야말로 쇼핑이 주는 가장 원초적인 재미다.

 

PRINT IS THE NEW LUXURY.

는 홈페이지뿐 아니라 인스타그램,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에 이어 최근 틱톡도 개설했다. 한 달도 채 안 돼 틱톡의 팔로어가 2만6000명을 넘어섰으니, 고무적이다. 그러나 나는 는 책으로 볼 때만 느낄 수 있는 ‘뭔가’에 대한 고민을 놓치 않을 것이다.
는 책으로도 보관 혹은 소장하고 싶은 욕심이 들도록, 그것이 주는 경험에 집중할 것이다.

 

OFFLINE IS THE NEW LUXURY.

나는 무리해서라도 단독 건물로 이사하고 싶었다. 많이 넓지는 않아도 의 성수동 사무실은 1층이 비어 있다. 이곳이 나는 와 결을 같이 하는 다양한 젊은 친구와 만나는 장소가 되길 희망한다. 5월부터 준비하고 있는 각종 소동에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모두가
참여하고 공유하길 바란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아도 되는 각자의 이상을 이야기하게 되길 원한다.

 

누구든 이 공간에서 재미있는 것을 기획하고 싶다면 언제든 내게 메일을 보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나둘 모여, 를 들고
의 사무실에 찾아와 나름대로 즐겨준다면 나는 조금의 퉁명함도 없이 이내 이렇게 말할 거다.

“마음에 든다니 정말 기뻐.”

 

마치 내 건물이라도 되는 양 호기롭게, 늘 그랬던 것처럼 당당히. 

201904 #134

By EDITOR'S LETTER

 

 

AT YOUR BEST YOU ARE LOVE

파리에 가면 꼭 ‘카페 드 플로르Cafe de Flore’를 가고 싶었다. 장 폴 샤르트르는 내게 뮤즈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와 시몬 드 보부아르가 카페 드 플로르에서 나눈 시간들의 냄새라도 맡을 수 있다면 내 존재감은 지금보다 현실의 지배를 덜 받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기회는 빨리 왔다. 2003년 겨울, 잡지사 에디터를 한 덕분에 패션위크 참여차 파리를 가게 됐다. 20대 초반 혈기왕성하던 나는 샤를 드골 공항에 내려 북역 근처인 10구의 엘리베이터는커녕 계단조차 낡은 6층의 호텔 방에 짐을 풀자마자 그곳으로 향했다.
카페 드 플로르는 9시가 넘은 밤이었다. 그날의 옷차림마저 기억나는데, 거금을 들여 구입한 에디 슬리만이 만든 디올 옴므의 흰 머플러가 포인트였고, 겉옷은 디올 옴므스러운 H&M 사파리 재킷이었다. 파리 통신원(아마 미리 예약해준)과 한국에서 함께 출발한 두 명의 동지도 함께였다. 강낭콩 색 의자에 앉아 ‘킁킁’ 샤르트르의 구토 찌꺼기라도 맡으려고 할 때쯤, 자그맣게 파리 통신이 이야기를 건녰다.
“저기, 그가 있어요.”
칼 라거펠트였다. 동양인으로서 미국 패션 매거진의 중심부를 뚫고 있던 스테판간Stephen Gan과 함께였다. 내 손에는 사진과 동영상을 찍을 수 있는 산요의 노란색 작은 카메라가 들려 있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던 혈기왕성한 시기였기에 가능했던 부탁, 도저히 그 사진을 찾을 길이 없지만 분명 그렇게 첫 파리, 첫 카페 드 플로르에서 그와 사진을 찍었다. 쿵쾅거리던 심장 소리가 여전히 생생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런던, 밀란, 파리를 전부 다 돌기는 무리한 스케줄이었다. 런던에서의 패션위크가 끝나고 밀란으로 가기 위해 히드로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계속 투덜댔다. 비까지 왔다. 나 스스로에게 ‘이제 부디 네 나이와 체력을 인정하렴’ 다그치며 눈을 감았다.
“그가 떠났대요.”
서울의 지인이 칼 라거펠트가 세상을 떠났다는 외신의 기사 링크를 더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운 좋게도’ 직접 본 그의 생전 마지막 피날레가 돼버린 뉴욕 메트로 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린 지난 샤넬 공방 컬렉션부터 카페 드 플로르에서의 추억까지 머릿속에 소환됐다. 그 앞에서 나는 스물세 살이기도 하고, 서른아홉 살이기도 했다.
자크 드 바셰르Jacques de Bascher. 밀란에서 펜디 쇼를 보며 진정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원조다운 그의 역량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하다가 파리에 도착한 첫 날 밤, 자크 드 바셰르를 떠올렸다. 밀란에서는 후배 에디터와 한 방을 써 별다른 생각을 하기에도 힘들긴 했다.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던 칼 라거펠트의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알려진 것은 2017년 발행된 전기 작가 마리 오타비Marie Ottavi가 쓴 자크 드 바셰르 자서전 를 통해서다. 자크 드 바셰르는 1951년 베트남 사이공에서 태어난 귀족 집안 출신의 사교가로 칼 라거펠트와 20년 가까이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의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 장 폴 샤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관계만큼이나 남달랐는데, 라거펠트는 오타비에서 “나는 자크 드 바셰르를 사랑했으나 우리는 신체 접촉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I infinitely loved that boy but I had no physical contact with him”라고 이야기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더불어 자크 드 바셰르는 이브 생 로랑과 은밀한 관계를 맺는 등 자유롭고도 심미적인 둘의 관계는 서른여덟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크 드 바셰르가 에이즈로 사망하면서 끝나게 된다. 자크 드 바셰르가 죽기 전날 밤, 라거펠트는 함께 있었다.
“칼 라거페트는 그의 어머니와 1989년 에이즈로 죽은 자크 드 바셰르의 골분을 섞어 흩날려질 것이다.” 샤넬의 발표가 이어졌다. 라거페트는 항상 자신의 장례식은 없을 것이며, 죽은 후에는 유골 가루를 자크 드 바셰르와 섞어 항아리에 담아달라고 이야기했다. The Beat Goes On. 샤넬 쇼에 도착하자 자리에 칼 라거펠트와 가브리엘 샤넬이 함께 있는 일러스트가 이 말과 함께 놓여 있었다. 쇼를 보는 내내 나는 패션보다 사랑을 생각했다. 사랑이 없는 패션은 사과나무에서 오렌지 향을 맡으려 하는 것이 아닐까.

카페 드 플로르에 가게 된다면 꼭 너와 함께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