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획일화다.
같은 성, 같은 국적, 같은 고향, 같은 이념 등으로 사람의 본질을 구분하고 편을 가르는 것처럼 위험하고 비겁한 일은 없다.
이미 세상은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인정한 지 오래됐다. 오히려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 매력을 느끼고 부러워하는 정서가 팽배하다.
그것을 혐오하거나 폄하하는 것은 자신의 미천한 수준을 드러낼 뿐이다.
반면 우리나라 사회는 다양성을 상실했다. 다양성을 밑거름 삼아야 단단하게 피어날 수 있는 개방성과 팽창성도 사라졌다.
평등은 평범으로 전락했고, 나와 의견이 다르면 적이 된다. 개인의 인권과 독립성을 가장 중시해야 할 진보적 가치는 그 어디에도 없다.
국민적 합의, 또 이런 구차한 말을 들먹이며 성차별 금지법 하나 요즘 바이브로 개정해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식 나이 계산법의 문제점은 즐비한 데 관심조차 없다. 또다시 다수결 중심의 여론조사 판이 됐다.
그리고, 지겹지도 않나 보다. 20세기 난무하던 도덕과 정의를 묻는다. 굉장히 고리타분하고 비열한 마녀사냥 방식으로. 그 잣대는 실로 보잘것없다.
누가 ‘덜 더럽냐’ 혹은 누가 ‘더 깨끗하냐’, 이 정도 차이인데 그 심판을 철 지난 감성의 언론이 주도하고 있다.
그 언론 위아래로는 분배에 충실하면서 선진국으로 가는 이론에 능하다는 적당히 부패한 선생들이 기득권을 꽉 쥔 채 자리를 놓지 않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그 엉덩이가 참으로 둔하고 더러워 그나마 의식 있는 자 중에 그들이 사라진다 한들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터놓고, 지금 20세기 도덕이 그리도 중요한가?
‘뜻밖의’ 생각을 갖고도 나라 밖을 나가 서 있기조차 어려운 게 현실인데, ‘다양한’ 생각조차 갈 곳이 없다.
세상이 아주 조금이라도 변할 줄 알았는데, 세력만 변했다.
깨라고, 열라고, 더 다양해지라고, 늦더라도 앞으로 가라고, 그래서 정말 다른 걸 하라고, 울부짖어야 하는데
자리 눈치만 보고 그 반대로만 가니 싹이 트지 못하고 열매는 바닥에 깨진다. 망자에게 위로의 말조차 꺼내기 겁나는 뼈 아픈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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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판권에부터 보이지 않는 패션 에디터 이종현은 가 지금까지 존재하고
서울 성수동에 아늑한 터전을 자리 잡아 스무 명이 넘는 팀이 생겨나고,
또 넓게 보면 차이나가 론칭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지난 4년, 그가 에 쏟은 20대의 시간이 새로 시작하는 30대의 앞날에
마치 그가 좋아하는 피겨들처럼 ‘피식’ 웃을 수 있는 추억이 되길 희망한다.
불과 3일 차이 나는 생일을 갖고 딱 열 살 차이 나는 너이기에 군소리를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