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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201601 #93

By EDITOR'S LETTER

 

반가운 뉴스가 있습니다.

 

1996년도에 나온 <트레인스포팅>의 후속편이 만들어진다는 거였죠.

전편을 만들었던 데니 보일 감독의 말에 따르면 이완 맥그리거, 이완 브렘너, 조니 리 밀러, 케빈 맥키드 등 기존의 주연 배우들이 모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합니다. 이 소식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것은 제 청춘 시절을 지배한 영화가 바로 <트레인스포팅>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 방에 있던 16비트 컴퓨터의 암호부터 PC 통신 시절 참여했던 모임의 아이디까지 모두 <트레인스포팅>의 주인공 이름인 랜튼을 사용했죠.

랜튼이 즐겨 입던 아디다스 저지는 컬러별로 사서 그처럼 꽉 맞게 입었습니다.

배꼽이 보이는 쫄티도, 낡은 스니커즈도, 두 팔을 휘적대며 걷는 껄렁거리는 발걸음과 초점 없는 눈동자도 모두 흉내 내느라 바빴죠.

 

영화 첫 장면의 내레이션은

인생, 가족, 직업, 미래, 대형 TV, 치과, 인스턴트식품, 운동, 결국 늙고 병드는 것…이런 보통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을 왜 선택해야 하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에서 이 대목은 반복됩니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덧붙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트레인스포팅>의 결말은 랜튼이 친구를 배신하고 기성 세대화되는 것처럼 보이면서 끝을 맺습니다. 더 이상 방황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어른, 그런 가정을 꾸리기로 하면서 말이죠.

이 결정은 세상에 진 것도, 청춘에 이긴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가 선택한 삶은 누구도 욕할 수 없으며 그 어떤 것보다 값지다는 뜻이겠죠.

 

2016년, 새로운 한 해가 밝았습니다.

모처럼 <트레인스포팅>을 다시 보면서 질풍노도의 10대 시절이 아련하게 떠올랐습니다.

그 시절 나는 어떤 삶을 살길 원했던가. 또 그렇게 살아오고 있는가.

정답이 어디 있겠습니까.

<트레인스포팅>의 후속편에서 나와 함께 나이를 먹은 랜튼이 그 답을 알려줄 리도 만무합니다.

 

그저 <트레인스포팅>이 끝난 후로부터 20년을 더 살면서,

하나 배운 것은 시간이 참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나를 찾는 과정에 소비될 때 비로소 가치 있다는 것입니다.

 

1월의 <데이즈드> 코리아는 서른 명이 넘는 국내외 창조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여러분 모두,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는 과정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1512 #92

By EDITOR'S LETTER

 

 

인터뷰를 사랑합니다.

 

라프 시몬스가 디올을 떠났습니다.

브랜드와 디자이너의 결별 소식 또한 연예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 존중하고 감사했다는 평범한 공동 명의의 보도자료만 남길 뿐이죠.

그 뒤 벌어지는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벌떼처럼 몰려드는 기자들, 과연 왜 그랬는지 궁금해하며 추측하는 대중들.

환희보다 고통의 심경을 담은 인터뷰가 더 ‘특종’인 시대니까 말입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분은 왜 라프 시몬스가 디올을 그만뒀는지 궁금했을지 몰라도

잡지 일을 하는 저로서는 어떤 매체의 어떤 기자가 그의 인터뷰를 담아낼 것인지가 훨씬 더 궁금했습니다.

연말 앞두고 회사에서 두둑한 보너스는 챙기겠구나.

 

그런데,

라프 시몬스의 심경이 담긴 인터뷰는 우리가 알 만한 그런 ‘유력’ 매체가 아니었습니다.

1년에 두 번 발행하는,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독립 매거진 <시스템(system)>이 그 주인공이었죠.

회당 1만 5천부를 발행하는 겨우 이제 6권이 나온 요즘 말로 ‘듣보잡’.

 

그런데,

이 잡지를 통해 누가 봐도 결별의 이유가 짐작될 법한 라프의 인터뷰가 실린 것입니다.

단, 정확히 말하면 이 인터뷰는 그가 디올을 떠나기로 발표한 직후에 이뤄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올 3월부터 8월 사이, 그러니까 계약을 더할지 말지 그가 한창 고민하던 시기에 <더 컷(The Cut)의 패션 칼럼니스트 캐시 호른(Cathy Horyn)과 라프 시몬스와 사이에 이뤄진 토막토막의 인터뷰를 한데 모아 실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솔직한 라프의 담경이 실려있었죠.

네, 누가 봐도 특종이었죠.

 

<시스템>에 특종 인터뷰가 실린 것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창간호에 실린 디자이너 니콜라스 게스키에르와의 인터뷰는 그가 몸담았던 발렌시아가의 모회사인 크링(Kering)에서 소송까지 걸 정도로 적나라한 것이었습니다.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 커플 칸예 웨스트가 그의 아내인 킴 카다시안을 화끈하게 스타일링한 화보도 있었죠.

 

이토록 <시스템>이 주목을 받자 결국 <뉴욕 타임즈>의 패션 저널리스트 바네사 프리드먼(Vabessa Friedman)이 흥미로운 기사를 내놓게 됩니다. 이름하여 ‘어떻게 작은 인디 매거진이 계속해서 특종 인터뷰를 잡고 있느냐’는 거죠.

그들은 <시스템>을 만드는 조나단 윙필드(Jonathan Wingfield), 엘리자베스 본 쿠트만(Elizabeth von Guttman) 등 네 명의 편집자와 인터뷰를 하게 됩니다.

이들은 특종 인터뷰를 잡는 비결을 두 가지로 압축합니다.

먼저 시간. 결코 단 한번의 만남이 아닌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중간 중간 긴 호흡으로 인터뷰를 진행한다는 거죠.

두 번째는 퍼스널리티. 이들이 라프 시몬스의 인터뷰를 케시 호른에게 맡긴 이유는 서로 강한 릴레이션십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패션계에서 ‘관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거겠죠.

그리고 덧붙입니다.

“물론 이런 인터뷰를 계속해서 진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도자료를 작성해서 잡지를 만들진 않을 것이다.”

 

<시스템>이 부럽냐고요?

다행히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 제가 받는 전화 중 가장 기분 좋은 것이 인터뷰 요청 문의입니다.

솔직히 돈을 쓰겠다는 것보다 훨씬 더 즐겁습니다.

비록 월간지라 <시스템>처럼 긴 시간을 지닌 인터뷰를 지금 당장 보여드릴 수는 없겠지만(준비는 하고 있습니다)

우리만의 시각으로 선별한 재기발랄한 뉴페이스부터 동시대가 사랑하는 쿨키즈들, 그리고 함부로 만날 수 없는 숨은 보석들까지.

<데이즈드>는 <시스템>보다 훨씬 더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뻔한 것은 감동이 되지 못합니다.

1등과 1등의 만남처럼 지루한 것은 없습니다.

2016년이 더 기다려지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데이즈드>스러운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201511 #91

By EDITOR'S LETTER

 

 

 

눈 사이가 먼 편입니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옆이 보입니다.

조금 과장을 덧붙이자면 학생 때는 칠판을 바라보고 앉아 있어도 짝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부 알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집중력이 부족했습니다.

마음을 다잡아도 어쩔 수 없는 기웃거림이 발동했습니다.

 

에디터 일을 시작하면서는

한 분야를 깊게, 마니아적인 관점에서 몇 페이지에 걸쳐

칼럼을 써 대는 선배들이 마냥 부러웠습니다.

먼 눈 사이를 탓하는 동시에

그들처럼 되기 위해 노력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다닌다는 강북 구석의 아지트에서 새우 깡에 소주를 나발로도 불어보고

프랑스 영화를 틀어 놓고 울다, 웃다

능력 밖의 아이템을 6페이지로 만들겠다며 데스크와 싸우다 말다

그 연예인이 가장 피하고 싶어했던 질문을, 뭐라도 된 양 집요하게 추궁하기도 했습니다.

 

채 1년은 안 걸렸습니다.

제 정체를, 눈 사이는 이번 생에선 좁혀질 수 없다는 것을 말이죠.  

 

그렇게 또 몇 년이 흘러

어느 날 문득(전 그 날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못 믿겠지만 마치 흰 두부를 뚫고 나오는 듯 묘한 기분이 든 순간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전 제 눈 사이가 먼 것을 상당히 좋아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그러고 보니 제 이상형이 옛날 옛적 SES 바다 씨(죄송합니다)부터

유독 저와 닮은 ‘거리감’이였다는 것도 생각났습니다.

 

얕지만 이 곳 저 곳 안 판 곳이 없는,

배당 받은 원고는 한꺼번에 창을 열어 놓고 한 줄씩 번갈아 쓰는

뭐, 그런 ‘잡’다함.

이게 저더군요.

 

동경의 대상은 누구나 있으며 때론 필요합니다.

저 역시 그들로 인해 더 이상 선글라스를 쓰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먼 눈 사이가 가려지면 진짜 제가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데이즈드> 11월호에는 여자들이 가장 닮고 싶어할 만한,

자신만의 색깔을 지닌 여자들의 이야기로 조금 더 많이 담았습니다.

여러분의 본질 찾기에 도움이 되길 희망합니다.

 

이현범

Bom Lee

 

이달의 사람

뎀나 바잘리아(Demna Gvasalia)

 

알렉산더 왕이 발렌시아가를 떠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궁금해한 건 알렉산더 왕의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과연 누가 발렌시아가의 새로운 수장이 될까 하는 부분이었죠. 패션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갈구하고, 세대교체에 환호합니다. 그렇다고 전통을 무시하냐고요? ‘숭고한’이란 표현이 무색할 만큼 아카이브를 찬양하고 그들이 용납하는 ‘과정’이나 ‘환경’을 거치지 못한 자의 잘됨을 눈에 뜨고 보지 못합니다. 패션은 삶만큼이나 이율 배반적입니다. 발렌시아가도 고민이 많았겠죠. 그들의 선택은 베트멍(Vetenemts)의 헤드 디자이너인 뎀나 바잘리아였습니다. <데이즈드> 10월호에서 ‘탑’이 입고 등장했을 정도로 요즘 가장 인기 있는 베트멍의 디자이너라는 점은 젊은 친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적인 카드입니다. 뎀나 바잘리아가 3대 패션 스쿨 중 하나인 앤트워프 왕립예술학교에서 공부했고,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 여성복 팀과 루이 비통에서 7년간 일했다는 경력은 어른들을 설득하기에 좋은 보증입니다. 발렌시아가는 현명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저 뎀나 바잘리아의 새로운 발렌시아가 컬렉션을 기다리면 됩니다. 과거와 미래에 양다리를 걸친 패션은 시작이나 과정보다는 그 ‘결과’를 가장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딱 ‘Bitch’니까요.

 

201510 #90

By EDITOR'S LETTER

 

 

 

<데이즈드>만의 생각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지나치게 생각이 많아서 문제”라고 했습니다. ‘나는 왜 남들처럼 운동을 잘하지 못할까. 나는 왜 남들처럼 끈기가 없을까. 나는 왜 한 우물만 진중하게 파질 못할까.’ 비교를 많이 하는 것도 문제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참 매사 자신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간혹 누구한테든 잘했다는 말을 들으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자기애가 부족하고 연민과 사랑을 구별할 줄 몰랐습니다.

대범해야 하는 순간 머뭇거렸고 현실에 안이했습니다.

철없이 다퉜고 경솔하게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그저 몇 해 전부터는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다고 스스로의 한계를 그었습니다.

 

부족한 것이 한 둘이 아닌 제가 <데이즈드> 코리아의 편집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출근한지 꼭 20여일 만에 제 첫 <데이즈드>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하나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저와 <데이즈드>가 참 닮았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함께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애초부터 남들과 다릅니다. 따라서 우리만의 생각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먹으려면 겁이 없어야 합니다. 겁이 없어지려면 남다른 컨텐츠가 있어야 합니다.

딱 90번째로 나온 <데이즈드> 코리아 10월호는 ‘다름’을 이야기합니다.

날 때부터 달랐던 탑(T.O.P)의 인터뷰부터 모델은 직업이 아니라고 당당히 말하는 현재는 모델인 김상우와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한 후 톱 모델의 반열에 오른 안드레아 페직, 그리고 어떻게든 기존의 한국 ‘사람’ 디자이너와는 다른 돌파구를 찾아 아이콘이 된 스티브&요니까지.

 

되바라질 예정입니다.

친구들도 좀 이용할 작정입니다.

그냥 넙죽넙죽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살 겁니다.

 

<데이즈드>코리와 저는

존재의 이유와 그 가치를 적극 드러낼 생각입니다.

우리는 우리만의 생각이 있습니다.

 

이현범

Bom Lee

 

10월의 물건

에르메스와 애플 워치가 만났다는 사실에 호불호가 갈립니다. 중국과 여성 고객을 노린 지극히 계산적인 조우라는 이야기부터 대놓고 아름답지 않다는 심미안에 대한 지적까지 이어집니다. 처음은 다 그런 법이죠. 게다가 디지털과 하이 패션의 만남이 언제 순탄한 적이 있었습니까? 허나 분명한 것은 후퇴가 아닌 진보란 사실입니다. 시도 조차 하지 않고 기존 플랫폼만 누린 채 살아간다면 소리 소문 없이 낙오되는 것이 순식간인, 어디로 튈 지 모르게 변화하는 초 현대 사회입니다. 키보드만 두드리는 비평은 넘쳐 납니다. 주저 말고 직접 뛰어 들어야 합니다. 부딪히고 깨져 봐야 깨닫고 나아가는 법이니까요. 최소한 그런 의미에서 <데이즈드> 코리아는 에르메스 애플 워치를 환영합니다. 우리도 비옥한 황토를 거부한 채 불구덩이로 뛰어 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