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믿어지지 않는 장면 속에 멍때리고 서 있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
긴 시간 울며불며 사랑하다 차라리 죽어라 하고 저주하며 힘들게 헤어졌는데, 어느 날 둘이 자주 가던 극장 로비에서 딱 마주친 순간.
너무 남 같을 때. 과연 한때 연인이긴 했나 싶다. 시간이 더 흘러 이 세상에 더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땐
거품 물고 까무러치기라도 했던가.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잠시 생각한 다음 먹던 밥이나 마저 다 먹었다.
사랑은 그토록 지나치게 잔인하고 흔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기이하고 귀하다. 우리 사랑은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진 환상처럼.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에겐 쩨쩨한 헛소리로 들리겠지만.
유튜브를 틀어놓고 잠드는 습관은 또 어디서 배워먹은 건지. 목구멍이 칼칼해 써야 할 원고를 미루고 불안한 잠을 택한 지난 밤,
잠든 기색이 있다면 알아서 좀 닥칠 것이지 꿋꿋하게 제 갈 길 가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용한 점쟁이처럼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Sunday Morning’을 들려줄 때 한 많은 귀신인 듯 몽유병 환자처럼 깨어나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다 들었다.
그러곤 다시 누웠다. 새삼스럽게. 비로소 그 노래와 루 리드를 왜 그토록 긴 시간 좋아한 건지 좀 알 것도 같다.
매춘부, 남창, 건달, 기둥서방, 깡패, 좀도둑, 양아치, 약쟁이, 거지, 드래그 퀸과 그 외 각종 잡다한 군상에 관한 그의 노래,
아니 그의 시는 무엇보다 야릇한 감정으로 어떤 기시감 같은 걸 던진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지만 언젠가 내가 살았던 듯한 세상인 듯.
2019년 여름 베를린은 몽땅 다 타 죽으라는 듯 더웠는데, 기후 위기로 인한 재앙의 징후라는 건 그땐 미처 몰랐었네.
난생처음 맛본 족발에 홀딱 빠졌고, 족발 중독엔 약도 없었으니 뒤룩뒤룩 살찐 육중한 몸을 이끌고 급하게 처방받은 다이어트 약을
오남용하기 바빴다. 몽롱한 상태로 식은땀을 삐질 대며 크로이츠베르크의 음반 가게에 들렀다가 덥석 루 리드의 노랫말과
그의 습작 시를 묶은 책 한 권을 샀다. 친구는 “루 리드가 너의 랭보냐”고 비아냥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랭보를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파리코뮌의 혁명가이자 시인인 랭보와 언제나 늘 세상 끝에 혼자 선 듯 굴었던
망나니 로커이자 시인, 사업가 루 리드 사이를 관통하는 알량한 퇴폐미에 반해 정신 승리는 끝난 상태였다.
어쨌든 그 둘은 모두 얼마나 육감적이고 섹시한가. 아직 젊지만 충분히 어리지 않은 서른 즈음부터 오늘까지
한 달도 쉬지 않고 매달 하드코어한 마감을 쳐내면서도 일을 그만두지 않는 내게 지금은 헤어진 애인이 그랬다.
“너는 그 망할 마감에 중독된 거야. 너밖에 몰라. 답도 없다. 완전 쩔었어.” 과연 부정할 수가 없었다.
밤새워 뭔가를 하고 천신만고 끝에 맞은 아침, 남들은 출근하는데 그제야 간신히 퇴근할 때면 좋아하는 영화 속 어느 뱀파이어 커플이
동트는 걸 보면서 부드럽고 작게 웃으며 죽어가는 장면을 생각한다. 그 모든 장면이 끔찍하게 멋져서.
마음속에는 늘 자기 자신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몽땅 다 불태워버리고 싶은 폭력적인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 후에 따라붙는 보상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한창 이태원 클럽을 전전하던 시절, 기필코 클럽 마감을 찍은 다음
승리자의 얼굴로 이미 녹다운된 몸에 차가운 물냉면과 소주를 탈탈 들이붓는 이유.
그토록 못생기고 고단하고 넌덜머리 나는 밤의 끝에 기절하듯 만나는 달콤한 잠의 맛. 안락과 평화.
그해 여름 족발 중독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온 <데이즈드>에 다이어트에 성공한 가뿐한 몸으로 돌아왔다.
여전한 건 여전하고 변한 건 또 변해 있어 아직 데면데면한 편집부 인간들을 무심한 얼굴로 관찰하며 혼자 웃는 시간이 잦다.
온종일 재잘거리는 세상 벅찬 끼순이와 자의식이 과해 보이는 우리 시대 젊은 남자, 우선 심리 상담을 권하고 싶은 귀여운 아웃사이더까지,
다방면으로 무궁무진한 얼굴들이 밉기는커녕 어서 빨리 야금야금 약 올리며 좋은 걸 나누고 싶다. 누군가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먼지 쌓인 나의 첫 <데이즈드>에 그 다짐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거칠고 천박하고 근본 없게. 아름다움과 그를 향한 욕망을 찬미하고 또 저항하면서.’
아, 지나온 시간을 통해 배운 것 하나를 더하자면 따뜻한 시선으로. 웃기게.
다시 밤이다. 밤의 시간은 고운 모래처럼 고요하니까, 말년의 루 리드가 부르는 ‘Sunday Morning’의 라이브 클립을 이천 번쯤 보고 또 본다.
최지웅
Choi Jiwoo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