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겐 십수 년째 매일 만나는, 오래된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2007년 여름, 태국 방콕의 친구를 통해 구입한 손목시계입니다.
이 시계는 카시오 제품으로, 스와로브스키와 협업해서 일본 도쿄의 멀티숍 러블레스Loveless에서 한정판으로 소량 발매된 것입니다. 이 시계를 일본에서 구입한 태국 친구가 자신이 더 이상 착용하지 않는 소장품을 한데 모아 작은 가게 같은 것을 열었는데, 그곳에 딱 그 시계가 있었습니다.
보자마자 한눈에 매료됐습니다. 블랙 고무 소재에 반짝반짝 빛나는 스와로브스키를 장식한 디자인은 제가 늘 꿈꾸던, 저항 정신 가득한 소년의 기개처럼 느껴졌습니다. 그와 상반되는 적당한 크기의 사각 프레임은 지적이고 안정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친구가 디자인별로
한두 개밖에 없는 거라고 말을 더하는데, 희소성 있는 나만의 것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문제는 가격이었죠. 구입 당시에는 200만원이 넘었지만 본인이 몇 번 차기도 했고, 중고이니 약 3만 바트, 그러니까 100만원 정도로 책정된 가격표가 떡하니 붙어 있었습니다. 남성지 패션 에디터였던 제 월급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액수였습니다. 삐걱삐걱, 나무 바닥 갈라지는 소리가 울리도록 그 좁은 가게를 그 시계를 차고 왔다 갔다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한국에서 같이 간 두 형은 “딱 네 거야. 그냥 네 거야. 이거 정말 못 구하는 거 알지?” 연신 반복했죠. 저축이나 노후 준비에 도움되는 관계는 지금껏 아니니까요.
목이 마르고 속이 타 들어갔습니다. 현기증마저 일 무렵 시계를 찬 채 거울 앞에 서 있는 제 눈에 뭔가 ‘번쩍’했습니다. 태국의 서슬 퍼런 여름 태양 빛이 창을 뚫고 들어와 시계 다이얼을 스치듯 지나가며 거울에 반사돼 순간적으로 손목에서 빛이 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것은 시계가 아니었습니다. 슈퍼맨이 슈퍼맨이 되게 하는 쫄쫄이 유니폼이고, 아이언맨이 아이언맨이 되게 하는 슈트와도 같았습니다. 네가 한없이 여리고 약한 나를 지켜줄 수 있겠구나. 나를 한없이 강하고 멋지게 변신시켜줄 수 있겠구나.
안 되겠습니다.
사야만 합니다.
수완나품 공항을 거쳐 서울의 집까지 가져가야 합니다.
아직까지는 그 시계 주인인, 친구와 흥정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갖고 온 옷 중에 그가 탐낼 만한 것도 생각해봅니다. 이 친구가 다음에 서울에 왔을 때 대접할 만한 식당도 떠올려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고, 두 형의 떠들썩한 조력도 함께했습니다. 20여 분 후 제가 갖고 있던 여행 경비 전액인 60만원 정도로 그 시계를 들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시계는 지난 15년간, 저의 가장 큰 자랑거리 중 하나였습니다. 처음 5년 차까지는 “시계 정말 예뻐요. 카시오에서 이런 것도 나와요? 역시···, 어디서 이런 디자인을 샀어요?” 아무래도 이색적인 디자인과 관련한 호평이 쏟아졌습니다. 2015년도를 넘어가자 이런 디자인의 시계는 많아졌고, 이런 호평은 잦아들었습니다. 대신 “와, 아직도 이 시계를 차고 있네요. 10년 전에도 본 거 같은데 잃어버리지도 않으시고요.” 뭔가 오랜 기간 우정을 나눈 친구를 대하듯 말해줍니다. 이 시계로 누군가에게 제가 기억되는 것이 마냥 행복했습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입니다.
수십 번 분실해도 마치 발이 달린 듯 다시 찾아오던 분신 같던 이 시계가 한두 달 전부터 끔찍하게 미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집에 두는 날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은 펑펑 시계를 앞에 두고 울기도 했습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유는 그저 이 시계에 저를 가둬두는 것이 슬퍼졌다고 할까요. 왜 나는 그때 거기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지 안타깝다고나 할까요. 이제 더 이상 20대 초반의 내가 아닌데 소년 타령하는 것이 고독하다고나 할까요. 세월과 현실이 주는 한없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변화 앞에서 무기력한 저 자신에게 듣기 싫은 잔소리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라고나 할까요.
요즘 저는 매일 밤 모바일 서핑으로 시계를 찾습니다.
새로운, 지금의 저를 대변할 만한, 제가 사랑할 수 있는.
불안합니다.
해소가 되지 않습니다.
만족할 만한 일과가 아닙니다.
다시 찾아가보라고 하면 도저히 찾을 수 없을 만큼 구석진 방콕의 한 낡은 상가 건물의 좁디좁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 만난 그 작은 가게에서 바로 그 시계를 만났습니다. 더웠고, 어렸고, 궁핍했습니다. 혹시 꿈이었을까요?
이 이야기에는 결론이 없습니다.
현실은 과정일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