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때 첫 가출을 했습니다.
이유는 제가 가장 아끼던 보물을 아버지가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건 다름 아닌 제가 신문을 볼 수 있던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꾸준히 모아온 여자 농구 신문기사 스크랩이 담긴 30권 남짓의 스케치북이었습니다.
박정숙, 조문주, 이강희, 박현숙 선수 등이 활약한 국민은행 여자 농구단의 팬이었으나 그와 라이벌이던 성정아, 최경희 선수 등이 뛴 동방생명(현 삼성생명)부터 한국화장품, 상업은행 등 모든 여자 농구 팀의 경기를 빼놓지 않고 보았습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대니까 경기에 대한 기사는 오로지 다음 날 새벽 집으로 배송되는 신문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 매일 아침 아버지보다 빨리 일어나 맨발로 현관문을 살짝 열고는 신문을 옆에 끼고 신이 나서 제 방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러곤 서둘러 농구 기사를 찾아 꼼꼼히 읽은 뒤 정성껏 가위로 잘라 스케치북에 풀로 붙였죠.
행여나 선수들의 모습을 잘못 자를까 노심초사하면서 말입니다.
특히나 제가 좋아하는 선수의 사진이 크게 실리면 드래곤 볼이라도 모은 것처럼 그렇게 들뜨던 기억이 납니다.
이 스크랩북의 백미는 사진이나 기사마다 펜으로 일일이 써놓은 저만의 분석 메모였습니다. 
승리와 패배 요인부터 각 선수별로 잘한 점, 잘못한 점을 마치 농구 전문가라도 된 양 하나씩 쭉 기록해뒀으니까요.
매일 아침 한 시간 정도 누리던 그 행복한 여정의 마지막 행동은 농구 기사가 잘려 나간 신문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아버지 방에 갖다 두는 것이었습니다.
집이 풍족하지 못해 제대로 된 로봇이나 게임기 하나 없던 형편에서 체조나 농구 선수가 되고 싶어 하던 어린 아들의 유일한 취미였던 그 스크랩북을 왜 내다 버리셨는지 사실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유를 듣긴 했는데 잘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그 당시 제가 겪은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가늠조차 안 됩니다.
기억에 또렷이 남는 것은 제 울음이 파도가 되고 바다가 됐던 것.
목청이 찢어져라 울다가 그 화와 설움이 멈추질 않아 집을 나갔던 것.
그리고 아버지가 이 일을 만회한다고 수원으로 날 데려가 현대와 한일합섬의 여자 배구 경기를 보여준 것.
그 경기장 맨 뒷줄에 앉아 까마득하게 내려다보던 선수들의 서브와 스파이크 장면, 관중석을 빼곡히 메운 응원의 함성과 그 울림.
그 경기가 3:2로 끝났는데 어느 팀이 이겼는지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전 지경희 선수를 응원했죠.
아버지는 아마도 농구장은 집에서 너무 멀어 제가 농구 다음으로 좋아하던 배구 경기가 열리는 곳으로 데려간 걸로 기억합니다. 
네, 이것이 제 인생 첫 번째 가출이자 첫 번째로 직관한 스포츠 경기에 대한 기록이며 더불어 사랑하는 것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느끼게 해준 첫 번째 이별에 대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전 스포츠 선수가 되고 싶었으나 그만한 체력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커서 꼭 부자가 돼 농구, 배구를 비롯한 스포츠 경기를 직관하는 것을 꿈꾸던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스포츠 캐스터를 꿈꾸기도 했습니다. 
이런 제게 4년마다 열리는 동·하계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은 가장 큰 축복이고 축제였습니다.
언젠가 좀 더 큰 TV로 스포츠 경기를 볼 테다,부터 언젠가 꼭 개막식에 가볼 테다, 언젠가 꼭 올림픽을 직접 보고 말 테다,까지의 꿈을 꾸던.

노심초사 오매불망 기다리고 기다리던 2020 도쿄 올림픽이 막을 내렸습니다. 팬데믹 상황에서 1년이나 연기됐고, 여전히 관중도 없는 운동장에서 뛰던 선수들의 피땀, 눈물을 보면서 전 다시 스포츠 선수를 꿈꾸던 어린 시절로 돌아갔습니다. 어찌나 기쁘던지요. 어찌나 감격스럽던지요.

그리고 이달 <데이즈드>에는 도쿄 올림픽을 통해 세계 4위라는 숭고한 기록을 세운 여자 배구 정지윤 선수와 다이빙 우하람 선수, 기계체조 류성현 선수를 담았습니다. 또 올림픽 최종 예선에서 아깝게 떨어졌지만 제가 그토록 좋아하던 성정아 선수의 아들인 동시에 현재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NBA에 가장 근접해 있는 농구 선수 이현중도 만났습니다. 

행복합니다. <데이즈드>는 스포츠와 스포츠인에 대한 존엄을 저희만의 미학으로 계속해서 응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게 된 지금 제 스스로에게 약속합니다. 다시는 스포츠를 향한 저만의 스크랩북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 8월 24일부터 9월 5일까지 도쿄 패럴림픽이 이어집니다. 인간의 한계를 감동의 드라마로 풀어내는 스포츠는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우리 같이 응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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