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ORMUZ

뱀을 부리는 피리처럼 나른한 선율이 흐르고, 온몸을 털로 감싼 모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목가적인 무드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전통 의상인 아바야, 히잡, 구트라의 실루엣을 변주한 룩이 연이어 등장했다. 현대적인 백과 아이웨어, 스틸레토 힐과 어우러져 묘한 조화를 이뤘다. 백 속에 감춘 칼, 양치기 지팡이와 비슷한 아사Asa에 매달린 백이 위트였다. 프런트 로의 모두를 웃음짓게 한 강아지까지. 전통을 해체하고 다시 유머로 봉합하는 법. Qormuz가 그 답을 보여줬다.

CARGO

경고문과 함께 자리마다 놓인 마스크. 방독면을 쓴 사람이 걸어나와 직접 착용 시범을 보이고, 이내 첫 룩이 폭풍 속을 뚫고 등장했다. 기하학적 실루엣의 화이트 셋업을 입은 모델이 비틀비틀, 모래 바람을 헤치듯 힘겹게 발걸음을 뗐다. 일순간 런웨이는 사막 한가운데로 변모했다. 이어진 룩들은 중동의 전통 위에 미래의 감각을 덧입힌 모습. 스트링, 태슬, 컷아웃과 레이어링으로 브랜드의 시그너처인 라인line을 강조했다. 피날레에 선보인 드레스는 압권이었다. 쿨하게 볼캡을 푹 눌러쓰고, 레더 뷔스티에와 글로브에 길게 늘어뜨린 러플 스커트의 매치. 마치 <매드 맥스>에서 튀어나온 프린세스 같았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뜨거운 박수 갈채.

IH NOM UH NIT

차가 굽이굽이 달렸다. 도착한 곳은 리야드의 예술·문화·크리에이티브 허브, JAX B5. 일렉트로 사운드가 공간을 채우고 이놈어닛의 무대가 시작됐다. 한 줄로 말하자면, 현대 서브컬처의 흔적이 물씬 풍기는 사우디식 스트리트 룩. 사막의 모래바람을 막는 페이스 마스크인 쉬마그가 스포티한 저지와 후디, 에슬레저 무드 속에서 뜻밖의 조화를 이룬다. 곳곳에 숨은 듯 등장한 브랜드의 시그너처, 마스크를 쓴 남성의 얼굴과 맞물려 묘한 잔상을 남기는데. 전통 문양을 새긴 스카프와 라인스톤을 장식한 디테일은 그들만의 헤리티지를 은근히 드러낸다. 이쯤에서 다시 떠올려보는 브랜드명의 의미. IH NOM UH NIT,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정체성의 표현.

ArAm

리야드의 하늘을 찌를 듯 솟은 킹덤센터 아래, 아람의 2026년 봄/여름 컬렉션이 출항했다. ‘Sea of ArAm’이라는 콘셉트답게 양손에 배 모형을 든 세일러 보이를 시작으로, 유독 자주 등장한 화이트에 블루와 레드 스트라이프의 컬러 조합은 마린 룩을 연상케했다. 이어서 여행 가방, 튜브, 서프보드, 랍스터와 물고기 모티프 아이템 등 물결치는 위트에 이목이 집중됐다. BBC가 ‘지구상에서 가장 창의적인 인물 중 한 명’이라 평한 아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아르와 알아마리Arwa Alammari. 사우디 패션 씬의 항로를 개척하는 그가 사막을 넘어 바다로 향한다. Anchors aweigh! 

TIMA ABID

‘평평한 나라’.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의 첫인상. 주홍빛 하늘 아래 끝없이 뻗은 지평선, 시야를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올해로 3회차를 맞은 리야드 패션위크가 막을 올릴 차례. 호텔에서 차를 타고 약 40여분간 평평한 도로를 달려 도착한 곳은 이름처럼 단단한 Bedrock, 이번 쇼를 위해 인공적으로 세운 거대한 바위산이었다. 리셉션, 밍글링, 런웨이 공간까지 크게 3개로 나누어진 이 곳에서 패션위크의 1일차와 2일차가 펼쳐진다. 리야드 패션위크 개막의 문은 쿠튀르 디자이너 티마 아비드가 열었다. 일곱 형제 사이 유일한 딸로 태어난 티마는, 그 ‘유일함’이 스스로 이름을 알리고자 만든 강력한 원동력이었다고 밝혔다. 이국적인 아라비안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얼굴까지 신비로운 검은 베일로 가린 모델이 등장했다. 앞모습과 반대로 모델의 등은 훤히 드러났다. 가려짐과 드러남 사이 긴장감이 시선을 붙잡았다. 이어서 등장하는 구조적인 레이스와 러플, 동그라미, 삼각형 등 실루엣. 이렇게 오로지 장식의 기능에 충실한 디테일이 쿠튀르의 묘미가 아닌지. 아라비아의 유산을 연상케하는, 얼굴을 가리는 불투명도 50퍼센트 정도의 오간자와 머리를 덮는 베일도 유독 자주 등장했다. 자신의 작품을 입는 여성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다며, 피날레에 선 티마의 벅찬 얼굴은 끈기와 노력으로 버틴 사람의 무언가로 빛났다. 그가 창조한 쿠튀르는 사막의 딸이 세상에 보내는 메시지였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무대, 사막 위의 황금빛 도시, 리야드 패션위크의 시작이었다.

Atelier Hekayat

암벽 틈에서 램프를 든 모델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Ticket to the Theater’라는 쇼 주제에 꼭 맞는 러플 칼라, 스트라이프와 폴카 도트, 드라마틱한 가운의 연이은 등장. 시그너처 아이웨어와 액자, 부채, 모빌 등 소품은 곳곳에 위트를 더하며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한 편의 동화를 완성했다. 알리아Alia와 아비르 오라이프Abeer Oraif 자매 디자이너가 그려낸 현실 속 판타지란 이런 것.

Vivienne Westwood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야자수 한 그루 한 그루가 의미있다. 토지와 생명, 번영의 메타포이기에. 그래서일까,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중동에서의 첫 쇼 플레이스를 리야드의 랜드마크인 팜 그로브Palm Grove로 택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쇼는 다른 쇼들이 모두 끝난 뒤 마지막 순서였다. 어두워진 하늘을 등지고 야자수 아래 앉은 이들의 얼굴은 궁금증과 설렘으로 가득했다. 뭔가 특별한 순간이 올 것만 같은 예감이 불쑥.
런웨이 초반부는 익숙한 비비안 웨스트우드 바이브. 체크와 스트라이프가 어지럽게 교차하고 과장된 라펠과 테일러링으로 비비안답게 포문을 열었다. 중반 쯤 지났을까, 사우디의 전통 직물이 돋보이는 드레스가 나타났다. 시퀸이 반짝이고, 베일이 흩날리고, 술이 달린 이어링이 흔들리는 그 장면은 내가 알던 웨스트우드가 맞나 싶었다. 일종의 문화적 충돌과 융합이었다고 해야하나. 생경한 광경이었다. 사우디의 장인 정신을 보존하는 문화기관, 아트 오브 헤리티지Art of Heritage와의 협업이 돋보이는 순간. 그리고 피날레, 보랏빛 드레스가 디즈니 공주처럼 등장하더니 한 줄기 환상처럼 쇼가 끝났다. 기묘하고도 찬란한 마무리. 사우디의 전통과 영국의 반항적인 하우스가 교차하는 꼭짓점을 엿본 기분. 어쩌면 패션의 미래는 이런 예측 불가한 조우에서 나올지도. 익숙한 걸 낯설게, 낯선 걸 우아하게 만드는 것. 그건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가장 잘 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editor PARK YEONJE(CATHRYN), KIM JIWON(JU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