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딘 나날이다.
뾰족한 게 없다.
내가 못 찾는 건지, 찾을 만한 게 없는 세상인지
뭐가 됐든 평이하다.

실존주의를 떠올린다.
장 폴 사르트르에게 꽤 영향을 받았다.
그중 그 <구토>.

실존주의? 별거 아니다.
옳고 그름이 따로 없는 거다.
신념은 스스로 정하는 거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한 것이다.
결국 자유롭되 책임을 지는 것이다.

10대 시절 탐닉한 실존주의는 3년여 도쿄 생활을 통해 증폭됐다.
세기말과 밀레니엄 초, 버블경제 말미가 낳은 고유의 일본식 개인주의가 더해졌달까.

책으로 배운 실존주의에 행동으로 배운 개인주의를 장착한
나는,
자신만만했던 나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어떤 기막힌 세련됨을 갖추게 될 줄 알았다.

웬걸,
되레 허겁지겁 됐다.

나 스스로 정의해서
내가 짜고 생각한 개념은,
또 그 안에서 나름 창조라고 짜낸 내 신념 나부랭이 같은 것들은,

유교(곧 죽어도 강조하고 싶다) 사회라는 틀 안에서
숫자로도
기갈로도
망치로도
도깨비로도
도저히 결코 안 되는 것뿐이었다.

돌겠네,
미치광대.

애매한 시대라고, 시대를 탓할 만큼 유치하진 않다.

근데 드러나면 죽잖아.
감옥이잖아.

기회는 소심하고 시간은 대범하다.
청춘은 순식간이다.

말을 안 하면 그 순간은 끝나요.
삽시간에.
연기처럼.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고요.

병신의 반격이 필요하다.

이겸
李兼
Guiom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