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 선생님이 칠판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한다.
갑자기 교실에 있는 우리 반 학생 50명 남짓의 눈빛이 빠르게 교환되기 시작한다.
사실은 몇 명,부터다. 나머지는 그들의 눈빛에 담긴 지시 내용을 파악하고 순종 혹은 복종하는 제스처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토록 일사불란할 수 있을까.
자리에서 한 명씩 일어서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괴기한, 누군가는 망측한 표정과 포즈를 취한다. 우리는 웃음을 참기에 여념 없다.
이것이 미션이다.
담임은 여전히 칠판에 무언가를 적느라 여념 없다.
이윽고 내 차례다.
스르륵 의자를 뒤로 빼고 자리에서 일어나 뭐라도 하려던 찰나,
휙, 담임이 뒤를 돈다.
아뿔싸, 걸렸다.
모든 것은 내가, 말 그대로 ‘덤터기’를 뒤집어쓰고 만다.

나는 운이 나쁜 애였다.

나나난나 나나나난나나 나나난나 나나나난나나
달려가는 여성시대~
방학이면 으레 아침부터 일어나 라디오를 틀었다.
목적은 하나였다.

사연이 담긴 편지를 써 보내 각종 경품을 받는 것, 받아내는 것, 고로 세간살이에 보탬이 되는 것.
초등학교 3학년이 어필할 수 있는 사연이라곤 별개 없었다. 먼저 엄마 이름부터 시작했다.
파란만장한 결혼 성공기부터 비련의 시댁살이, 자식과 남편 사이에 있던 깔깔 에피소드 등등등.
AM, FM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라디오 방송사에 그 톤 앤 매너를 맞춰 각각 다른 내용을 보냈다.
반자동 세탁기, 도서상품권, 동글이 청소기, 무선전화, 비디오 등등등.
사연이 채택돼 전파를 타고 집으로 경품이 도착하면 할수록 사연 아니 ’NO사연‘의 당사자인 엄마는 혀를 내둘렀다.
가장 쓸모없는 것은 주유권이었는데, 차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유권은 교차로 신문, 물물교환 코너에 올려 팔았다.
엄마 이름이 방송사 한 바퀴쯤 돌고 난 후 아빠, 이모, 할머니, 여동생의 이름까지 번갈아 써가며 프라이팬부터 냉장고까지 마련했다.
집안의 복덩이였다.

나는 운이 좋은 애였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이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다이내믹한 일들을 몸소 겪은 후 비로소 깨달은 게 있다.
그건 다 운이 아니라 실력이었다.
담임 선생님에게 걸리지 않은 친구들은 나보다 몇 배는 더 재빠르되 조용히 앉았다 일어서고
배꼽 빠질 만한 포즈를 취할 줄 아는 민첩한 몸놀림을 갖췄다.
라디오에 온 가족 명의를 도용해 보낸 사연이 당첨돼 경품을 쏟아지게 받은 것 또한
날 때부터 스스로도 소름 끼치도록 능수능란한 거짓말을 갖춘 덕분이었다.

요즘 여럿 나를, 나의 과잉을, 나의 지나침을 염려한다.

지금 나는 운이 아닌 실력이 필요한 때다.

지혜롭게 대화할 줄 아는 포용력,
상대의 아픔과 고통, 나아가 그 결핍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력,
모두가 나 같지 않고, 나 같을 수 없으며, 나 같아서도 안 된다는 성찰력.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힘을 주소서.

계절도, 달력도, 여정도 벌써 반이 지났다.

 

이겸
李兼
Guiom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