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날) 그대에게
우선 실망했어요.
해도 해도 너무 하잖아요.
이렇게까지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건 정말 아니잖아요.
사람 탈을 쓴 건 맞죠?
그동안 그대를 찾으려 제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보고 있었죠?
대신 그만큼 잘해줘야 해요.
아, 아니에요.
바라는 건 없어요.
그냥 나타나기만 해요.
정신과 육체, 더는 안 아프게 최대한 건강하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먼저 베를린에 같이 가요.
그렇게 좋다는데 스물여덟 살 때인가 가보곤 한 번도 못 가봤어요.
비행기에서는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도착해서는 관광객처럼 돌아다니기도 하고 클럽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어요.
서울로 돌아와서는 집 뒤 작은 숲에 난 산책로를 걸어요.
가볼까 하다가 그대가 오면 같이 가려고 미지의 세계로 남겨두고 있어요.
강아지든 고양이든 반려동물과 함께해도 좋아요.
단, 2년 계약인 집이니 늦지 않게 나타나요.
영화든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전시든 공연이든 뭐든 같이 보러도 다녀요.
혼자 가기 뻘쭘한 성격 탓에 못 보고 놓치는 게 많아요.
음악 축제가 그리 많던데 얼굴 타도 좋으니 하루 종일 서서 즐기며 스트레스도 날려요.
기회가 된다면 서로의 가족도 알뜰히 챙겨줘요.
같이 밥도 먹고 대화도 나누고 어릴 때부터 살아온 이야기도 나눠요.
제가 또 나름 어른들에겐 꽤 잘하는 성격이라 그대도 흡족할 거예요.
마지막으로 <데이즈드> 러브 & 프러포즈 에디션을 같이 봐요.
남들의 사랑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도 어떻게 지내면 좋을지 그려봐요.
책에 나온 커플 아이템도 사고 가라는 곳도 가보고 하라는 것도 해봐요.
메이크업도 따라 해보고 언제가 될지 몰라도 결혼식도 꿈꿔 봐요.
원래 전 뭐든 커플로 함께하는 걸 참 좋아해요.
사실 그러려고 이 책도 만든 거예요.
흡연보다 더 빨리 늙는 원인이 외로움이라는데 외롭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나타나요.
꿈에서라도 좋으니
꿈에서라도 괜찮으니
꿈에서라도.
P.S.
다 하기 싫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그대, 나타나기만 해요.
이겸
李兼
Guiom L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