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에디션에 이어)
그것은 바로 화상 통화로 진행된 프랑수아 오종 감독과의 인터뷰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자택에서, 전 서울의 <데이즈드> 사무실 1층에서였죠.
대체 프랑수아 오종 감독이 제게 어떤 존재냐 하면요,
당시 인터뷰 기사에도 썼지만 제 삶을 바꾼 사람입니다.
열일곱 살 무렵, 아주 우연히 그 말도 안 되게 느린 속도의 인터넷을 휘젓다가
그가 만든 15분짜리 단편영화 <썸머 드레스A Summer Dress>를 보게 됐는데요.
네, 자막도 없어서 프랑스 말을 들리는 대로 번역하면서 말입니다.
거기에 이런 장면이 있어요.
소년이 꽃무늬 파란색 드레스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장면요.
그때 네, 전 뭔가 자유를 느낀 것 같아요.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
같은 거 반복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제가
이 영화를 열 번, 백 번, 천 번도 넘게 다시 보면서요.
내 존재에 대한 현재와 미래 그리고 꿈을 생각했습니다.
모르겠지만, 특별하고 싶었어요. 다르고 싶었어요.
그렇게나 큰 선물을 준 프랑수아 오종과 대화를 나누다니 얼마나 행복했는지요.
그 영화처럼 딱 15분간이었지만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 인터뷰를 마치고 기사를 작성하고 난 후 말입니다.
저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어요.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우울해졌죠.
프랑수아 오종은 그 뒤로도 제게 수많은 영감을 선사한 작품을 연속으로 세상에 선보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전 대체 뭘 했나 싶더라고요.
그 감독에게 아마도 전 그저 전 세계 수많은 팬 중 한 명인 동양의 에디터일 뿐이라고 생각하니제가 한없이 작아졌습니다.
열일곱 살 때 품은 그때 그 마음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건지 제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달에도 썼지만, 전 이야기를 만들고 캐릭터를 창조하고자 하는 사람이고자 했으니까요.
그래, 그렇게 염원하던 그거부터 해보기로 했습니다.
장편 필름, 네, 그걸 흔히 영화라고 부르죠. 그 플랫폼에 맞서보자.
결심했습니다.
그래야만 다음에 어디선가 프랑수아 오종 감독을 만나면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올 초부터 준비했습니다. 프랑수아 오종과 인터뷰하던 <데이즈드> 1층을 본거지 삼아 말입니다.
무조건 촬영은 저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데이즈드>의 영상을 만드는 ‘렉스트림’과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배우고 깨지고 아프게 성장하면서 우리끼리의 스토리도 정성껏 만들고자 했습니다.
지난 샤넬 제주 행사에 주요 멤버 셋 유록, 윤우, 성재를 데리고 가서 제 포부를 밝히고 일종의 도원결의를 했습니다.
<데이즈드> 팀에도 양해를 구하며 이야기했습니다.
따뜻한 응원과 지지가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라는 작업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대본도 써야 하고, 캐스팅도 해야 하고, 아카이브 패션 영화다 보니 옷도 준비해야 했습니다.
우리 ‘렉스트림’ 크루들은 너무도 현명하고 매력적이지만
나도 그들도 영화는 처음이었으니 울다 헤매길 몇 날 며칠.
매번 촬영이 끝나면 드는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관둬야겠다.
오늘이 9월 17일이니까 촬영한 지 벌써 두 달여가 되어갑니다.
촬영으로 따지자면 75% 정도 마쳤고, 모레면 촬영 순서상 마지막 장면도 찍습니다.
일부러 맞추려고 한 건 아니지만, 첫 촬영일이 하필 7월 27일이었는데요,
그날은 4년 전 ‘렉스트림’을 시작한 날이기도 하니 감회가 더욱 남달랐습니다.
네, 제가 영화 이야기를 처음 꺼낸 그 제주도에서 그렇게 시작했으니까요.
전염병을 뚫고 하나가 되어
이렇게 지금까지···.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살아 있음을 느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깨달았습니다.
영화는 후반 작업이 중요하다잖아요.
촬영도 한 달 정도 더 해야 하지만 마지막 작업까지 마무리하려면
앞으로의 여정 또한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오늘 정도는 말하고 싶었습니다.
2022년 봄, 가장 화창하고 아름다운 날,
여러분에게 보여주게 된다면 참 좋을 테니까 말이지요.
현장에서 접해보니 지금까지의 지식만으로는 안 되겠더라고요.
지난주부터 영상 촬영과 편집에 대한 과외도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재밌는지는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네, 전 다시 <썸머 드레스>에 잠 못 이루던 열일곱 살로 돌아가려 합니다.
이 영화에 OST로 쓰인 ‘Bang Bang’을 들으며 살포시 몸을 흔들던 그때로 말입니다.
부디 절 지켜봐주시고 사랑해주시길 바랍니다.
전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니까요.
표현하는 사람이 될 테니까요.
순수하게, 저답게.
+
2015년 10월호부터 ‘에디터스 레터’를 쓰기 시작했으니 이번 2021년 10월호가 딱 6년이 되는 레터입니다.
지난 6년 동안 정말 많은 이야기를 토해냈습니다.
전 이 소중한 공간에 책에 대한 자랑보다는 제 생각과 시간을 공유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는 이곳이 제 영혼을 도려내는 쓰라린 고통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이제 이 공간에 대한 예의로라도 조금 휴식을 가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데이즈드>에는 글을 잘 쓰는 에디터가 많으니까요.
당분간 그들의 이야기를 번갈아 담으면서 <데이즈드>의 다채로운 색깔을 보여주는 진짜 ‘에디터스 레터’로 가보려 합니다.
그간 제 주접, 똥글, 다 받아주시고 들어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사랑했고, 사랑합니다. <데이즈드>의 이겸은 계속되니 이쯤 하겠습니다.
이겸
李兼
Guiom L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