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기 책을 다섯 권이나 샀습니다. 글을 읽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 합쳐 스무 페이지도 읽지 못했습니다.
한 장을 넘기다가 휴대폰 메시지를 봐야 했고, 한 줄을 읽다가 PC를 쳐다봐야 했습니다. 다른 책으로 바꿔볼까 하다가
아이즈원과 함께한 <데이즈드> 댄스 챌린지 반응을 봐야 했고, 사무실에서 읽어야지 했더니 그날 따라 차고 있던 셀린느
귀고리가 너무 무거워 그걸 떼고 어쩌고 하느라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잠들기 전에 보려고 꺼냈더니 허리는 왜 이리 쑤시는지,
그렇다고 엎드려 읽으려니 또 목이 저려 다시 돌아눕기를 반복하다 잠이 들었습니다. 주말, 양평 집에 가서 한적하게 휴대폰도
끄고 책을 읽어보려 했으나 몇 달째 세종시 집에만 갇혀 계신 엄마, 아빠가 눈에 밟힙니다. 키우는 강아지도 보고 싶습니다. 현저히
떨어진 집중력도 문제였지만 전염병이 창궐한 시국에 열두 살 생일을 맞은 <데이즈드> 5월호를 만드는 것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았습니다. 비로소 증명돼버렸습니다.
네, 전 장사꾼이더군요. 그것도 아주 능수능란한 꾼 중의 꾼.
어릴 적 노래방에서 친구 녀석이 제 가방 속 세계문학 전집 중 한 권을 발견하고 외쳤죠. “뭐야? 너 문학 소년이야?” 그렇게
생긴 문학 소년이란 별명이 싫지 않았습니다. 일부러 쉬는 시간에 더 책을 꺼내 읽었을 정도로 그에 걸맞은 삶을 살고자 노력도
했습니다. 희미하지만 결코 옅지 않았던 문학 소년이라는 타이틀이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깨끗하게 씻겨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진짜 제 모습일 장사꾼이 또렷이 드러났습니다.
한 달 내내 매일 돈 이야기를 했습니다. 온갖 은행과 신용보증기금, 신용보증재단, 중소기업진흥공단에 배낭을 메고 열심히
다녔습니다. 사람마다 기능이 다 있다고 하는데 네, 전 사실 이런 것을 무지 잘합니다. 어머니가 그러더군요. “어릴 적
네 별명이 은행원이었던 거 기억하니? 100원 한 장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해서 썼는지 우리가 다 혀를 내둘렀지.” 2년 반 전 제가
<데이즈드>를 발행하는 작은 회사를 운영해야 한다고 말했더니, 뭐 걱정이 없으시다면서 말이죠.
과거 제가 은행원이었든 문학 소년이었든, 2020년 5월의 봄은 장사꾼으로서의 기지가 절실히 필요한 나날입니다. 숫자와 싸워야
하고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난달 제가 이 페이지에 썼던 말처럼 허망하고
싶지 않습니다. 억울하게 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수없이 남발했던 어떤 약속을 지키고 싶습니다. 따라서 요즘의 저는 지극히
메마르고 차가우며 까칠하고 기계적입니다. 울고 젖고 흔들리고 방황하던 과거의 전 사치일 뿐입니다.
비록 전 희고 깊은 주름이 파일지언정 결코 열두 살의 <데이즈드>마저 장사꾼의 그림자를 덧씌울 수는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존재의 이유를 놓칠 수 없습니다. 읽는 잡지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달 장사꾼으로서의 정체가 탄로난 제 레터는 젊고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힘을 빌렸습니다. 김혜준(푸드 콘텐츠 디렉터), 박상영(소설가), 박우성(모델), 백현진(작가), 상우(예술가),
신광호(<보그> 편집장), 오선희(자유기고가), 오은(시인), 우원재(뮤지션), 이랑(뮤지션), 장우철(작가), 정성일(영화 평론가),
정지연(<브리크> 편집장), 조정민(공간 화이트노이즈 디렉터), 한다솜(사진가), 황소윤(뮤지션) 등 각계각층에서 피땀 흘려 고군분투하고 있는
열여섯 분의 진실되기 그지없는 글을 빼곡하게 담았습니다. 다름 아닌 ‘2020년의 5월’이라는 주제로 말입니다.
마음이 놓입니다.
해가 밝습니다.
열두 살, <데이즈드>는 이토록 두툼합니다.
이제 다시 제가 구입한 다섯 권 중 무려 네 권이나 되는 책의 저자인 롤랑 바르트와도, 과거 읽었던 것을 요즘 이 지경에 맞춰
되새기고 싶었던 <페스트>의 작가 알베르 카뮈와도 만나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고통이 다 끝나고 정말 그런 날이
오게 되면 장사 잘하는 문학 소년 정도로 불리길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모두가 쓰리도록 아픈 이 봄, <데이즈드>를 읽어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