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긴 것은 매번 다음 달이면 이 페이지의 글을 좀 제대로 쓸 수 있겠다 싶은 거였다. 콩보다는 꿀깨 송편이길 정도의 바람이랄까. 더 웃기게 된 것은 이제 다음 달에도 글을 제대로 쓸 수 있겠다는 기대를 안 하게 된 거다.

허망의 시간이다. 영화 속 주인공이 예상과 달리 초반에 죽을 때 허망하다고 한다. 공들여 맞춘 퍼즐이 순간의 부주의로 산산조각 날 때 허망하다고 한다. 믿었던 지인에게 사기당할 때 허망하다고 한다. 박경리의 에서 ‘천일애미’가 그랬다. 살고 보니 세상만사가 다 덧없고 허망하다고. 천일애미가 누구더냐. 마당쇠 천일의 어미로 첫째 천일이와 둘째 부일이 그리고 딸까지 출가시키고 남편과도 사별한 여인이다. 남편 생시에는 과묵하고 단정하던 아낙이, 이제는 말씨며 옷맵시며 느슨한 채 밭고랑에 쭈그리고 앉아 영호네 배추 솎기를 도우며 내뱉던 말이다. 허망은, 천일애미처럼 살만큼 살아본 사람들이 내뱉을 때 더 쓴 말이다.
더 진국인 법이다.

“왜 마스크를 쓰세요?” 살면서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 중 하나다. 누군가는 마스크를 벗고 있는 나를 보고 못 알아보겠다며 유난을 떨기도 했다. 20년도 더 됐다. 마스크를 써야 안락함을 느낀 지. 이번 파리 패션위크에서는 마스크를 쓸 수 없었다. 파리에 도착한 첫날, 여느 때처럼 마스크를 쓰고 에펠탑 근처 촬영지로 가던 도중 한 현지인이 내게 외쳤다. “코로나 바이러스!” 이어 찾은 쇼장에서 마스크를 쓰고 앉아 있자 서울에서 온 선배들이 말한다. “마스크 벗어. 괜히 오해받아.” 오히려 가장 통제받고 싶던 시기에 나는 마스크를 벗었다. 벗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내게 굉장히 큰 수치심을 주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다는 것, 내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탈리아가 위기다. 유럽과 미국도, 이란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도, 중국을 포함한 여타 아시아도 마음 놓을 상황이 아니다. 도쿄 올림픽이 어찌될지 모르고, 150주년을 맞아 대대적으로 준비 중이던 멧 갈라가 연기됐다. 노래를 부르며 바이러스 공포를 극복하고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에 대한 경의가 넘치고, 동양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멈추라는 메시지가 쏟아진다. 마스크 착용을 병에 걸렸다는 표식으로 오해하던 서양인들도 마스크는 곧 자신을 지키고 상대를 보호하는 생존과 관련한 최소한의 보호 장치라는 당연한 사실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끔찍한 상황에서도 이야기는 남는 법이다.

하나 내겐 마냥 허망의 시간이다. 이 충격적인 나날의 연속은 공들여 쌓아 올린 나와 주위의 모든 것이 예상과 달리 빠르게 사라지거나 산산조각 날 수도 있으며, 마땅히 믿거나 기댈 곳조차 없는 나 같은 독립적인 플랫폼이 지닌 불안이라는 한계를 새삼 깨닫게 하고 있다. 천일애미처럼 남편마저 떠나고 느슨해진 채 세상만사 다 덧없고 허망하다고 내뱉고 싶지 않다. 어떤 순간에도 첫 단추부터 정갈하게 꼭꼭 싸맨 채 상대의 눈을 마주 보고 단정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아무리 단문이라도 글로 거짓 연기를 할 수 없다.

이달 허망에 빠진 이 페이지의 마지막은 1925년 1월 1일에 쓴 한 바닥짜리 루쉰(으로 유명한 중국의 문학가)의 글 ‘희망’의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로 대신한다.

내 마음은 유달리 쓸쓸하다. 그러나 내 마음은 편안하다. 애증爱憎도 없고 애락爱乐도 없고 색깔도, 소리도 없다. 아마도 나이가 든 모양이다. 내 머리가 벌써 반백半白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내 손이 떨리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내 넋의 손도 떨리고 머리도 반백일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이는 벌써 여러 해 전부터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내 마음도 피비린내 나는 노랫소리로 가득 차 있을 때가 있었다. 피와 쇠, 불꽃과 독, 복구復舊와 복수로, 그러고는 갑자기 모두가 공허로 되었다. 그러나 때로는 덧없는 자기기만적인 희망으로 그것을 메우려고도 하였다. 희망, 희망, 이 희망을 방패 삼아 덧없이 어두운 밤이 밀어닥치는 것을 거부하려 하였다. 방패 안쪽도 마찬가지로 공허 속 어두운 밤이라 해도. 그러나 그래 봤자 서서히 내 청춘을 소모시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중략)

나는 혼자서 이 공허 속의 어두운 밤에 도전할 수밖에 없다. 비록 내 몸 밖의 청춘을 찾아내지 못한다 해도, 스스로 내 몸 안의 황혼만은 떨쳐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어두운 밤은 어디 있는가? 지금은 별도 없고, 달빛도 없고, 웃음의 유현함도 사랑의 난무도 없다. 청년들은 평화스럽다. 그리고 내 앞에 마침에 참된 어두운 밤조차도 없는 것이다.
절망은 허망이다. 희망이 그러함과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