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경기도 안양시 호계동 주공아파트 2동 303호에 살았다.
안방, 작은방 그리고 부엌과 화장실, 열세 평 남짓한 공간에서 아빠와 엄마 그리고 한 살 터울인 여동생까지 그렇게 네 식구가 함께 살았다.
회사에 다니는 아빠와 엄마는 저녁이 돼서야 귀가했다.
두 분이 야근할 때면 꼼짝없이 동생과 둘이서 저녁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동생에게 식당 놀이를 제안했다.
넌 요리사이고 나는 손님이니까, 착한 동생은 늘 밥상을 차렸다.
그리고 만화를 봤다.
그러면 왠지 엄마가 더 빨리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는 그해(아니 일생에서) 나를 가장 강력히 사로잡은 만화였다.
“용기와 지혜로 헤쳐나간다
우주 평화 위해 싸우는 용감한 친구들
자랑스러운 친구들
에어스타 타고서 하늘을 나는
원더 키디 원더 키디 원더 원더 원더 키디
신기한 메달이 뿜어내는 무한한 힘에
이슬처럼 쓰러지는 우주의 악당들
지키자 평화를 우주의 평화를
달려라 아이캔, 날아라 예나
원더 원더 원더 원더 원더 키디”
소방차가 부른 주제곡이 TV에서 흘러나오면 나는 밥 숟가락을 멈췄다.
SF란 말이 뭔지도 모르는 열 살 어린이의 눈에 비친 2020년의 우주는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그 행복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 만화는 단 13화로 끝났으니까.
동생과 함께 쓰던 작은방 2층 침대에 누워 곱씹고 또 곱씹었다.
진짜 2020년이 되면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마법의 메달을 차고 우주의 악당을 물리치는 아이캔이 돼 있는 것은 아닐까.
꿈만 같던 시간은 내 생각과 비전을 지구에서 우주로, 현재에서 미래로 확장시켰다.
그 뒤 보게 된 영화 와 등은 그 가치관을 더욱 공고히 했고,
언젠가 편집장의 글에도 쓴 것처럼 중학생 시절 3년은 내내 매일 밤, 달에 대한 글만 썼다.
그래 간혹 어쩌면 나는 지구에서 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어코 2020년이 왔다.
아이캔이 아닌 여전히 이현범의 모습으로.
그래서 를 오마주한 패션 화보를 찍어보기로 했다.
준비하던 중 문득 그 만화의 마지막 대사가 떠올랐다.
“사랑과 평화가 있는 별에선 이제 필요 없어.”
마법의 목걸이로 악당을 물리치고 아이캔과 예나가 우주 어딘가에 그것을 버리며 나누었던 바로 그 말이.
사랑과 평화.
패션계에서 유독 서러울 정도로 차별받는 동양인이 함께 힘을 합쳐 우리의 존재감을 어필하면 어떨까.
다소 거창하게 말해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미래 그리고 사랑.
2020년 1월, 나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놀랍게도 여전히, 우주의 원더 키디 세계관을 바탕으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