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티
몇 년 전 <진실게임>이라는 프로그램이 꽤 잘나갔습니다. 구성은 간단합니다.
가짜가 진짜를 연기하는 가운데 누가 진짜인지를 찾는 게임입니다. 대상은 연예인의 친척이거나 기네스북 등재자,
때로는 누가 남자이고 누가 여자인지를 맞히기도 했습니다. 조금 허술해 보이는 진짜와,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훈련된 가짜를 마치 탐정이라도 된 양 찾아내는 쾌감이 주는 오락성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모창을 잘하는 가짜 중에서 진짜 가수를 찾는 <히든싱어>처럼 진화를 거듭하며 여전히 대중에게 통하는 소스가 되고 있으니까요.
“차라리 팔로어 수를 좀 사세요.”
근래 가장 자주 듣는 말입니다. 쇼핑으로 모든 스트레스를 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제가 유독 사고 싶지 않은 것, 바로 디지털이라는 무형의 공간에서 숫자를 늘리기 위해 사야 한다는 매거진 SNS의 팔로어 수입니다. 거의 20여 년을 패션계에서 동고동락한 지인이 “그래도 브랜드에서는 숫자를 중요시해. 티도 안 나는데 뭐 그리 뻣뻣하게 굴어?”라는 타박에 마음이 흔들립니다. 현재의 시스템에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매거진 커버에 형광 색깔 로고를 박느라 돈을 쓰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니까요.
그러다 3일 전 우연히 본 한 게시물을 통해 정신을 차려봅니다. 요즘 잘나간다는 공간에서 젊은 디자이너의 티셔츠를 입고 9월호 <데이즈드>를 두 손 가득 투명 봉지에 담아 들어 올린 사진 한 장이 담긴 인스타그램의 포스팅. 진짜는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것이니까요. 최근 3년여간 하이패션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브랜드는 베트멍입니다. 그들은 논란과 이슈 사이를 교묘히 오가며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바이럴 피스를 양산할 줄 알았고, 금기시되던 기존 브랜드의 로고를 과감한 협업을 통해 재창조해냈습니다. 한마디로 ‘왜 안 돼?’ 정신이랄까요. 베트멍이 협업하면 죽어가던 브랜드도 살아났습니다. 물론 베트멍이 선택한 브랜드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신발이든 티셔츠든 심지어 택배 회사든 자신만의 오리지낼러티를 지닐 것. 그들이 양산한 또 하나의 혁신은 모델 캐스팅입니다. 개성 있는 보통 사람을 런웨이와 캠페인 모델로 적극 활용한 것입니다. 네, 과거 마르지엘라도 그리했듯이요.
헤어와 메이크업을 바꿔가며 옷에 따라 연기하는 톱 모델의 시대를 넘어 적재적소 이미지에 맞는 사람을 쓰는 캐스팅의 혁신은 베트멍만이 아닌 디지털 시대 패션 브랜드 전체의 새로운 세계관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의 가치가 뜨면 다양한 어젠더를 지닌 또 다른 세력이 출현하기 마련입니다. 포스트 베트멍 시대의 양상은 안개처럼 자욱한 미래의 패션계에 누가 어떤 콘텐츠로 승리를 움켜쥘지 마냥 흥미진진한, 춘추전국시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야흐로 ‘DAZED’하고 ‘CONFUSED’합니다. 멍하고 혼란스러우며 분명치 않습니다.
<데이즈드> 한국판 역시 혼돈의 시기,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월간지의 기존 셈법을 무시한 채 다양한 실험을 곁들여 게릴라식으로 책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찾아온 10월호, 실제가 주는 가치를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서로의 사촌도, 연인의 키스도, 갓 스물이 된 친구 사이도 모두 실제고 진짜입니다. 진실의 힘을 이길 수 있는 가짜는 패션계에도, 디지털 세계에도, 감히 여러분의 삶에도 없음을 믿(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