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게 산다고 해야 할까요?
요즘 그렇습니다. 꼬박꼬박 장도 보고, 톡톡한 털 슬리퍼도 사고, 제법 근사하게 커튼도
만들었습니다. 빗소리도 챙겨 듣고, 못 믿으시겠지만 감정에 따라 변하는 다람쥐의
걸음걸이까지도 느끼고 삽니다. 친구 녀석들이 찍어대면 그렇게 타박하던 ‘음식 사진’도 나서서
찍고,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근처 공원에서 들꽃을 꺾을 예정이니 말 다 했죠. 행복이 가득한 집,
그 표본입니다.
자유. 거창하게 이런 말을 써봅니다. 우리나라에서 자유는 통속적으로 크게 세 가지 의미인
듯합니다. 일제 강점기를 벗어난 뒤 누렸던 민족적인 독립과 교도소를 출소한 후 얻게 되는
육체적인 해방, 그리고 사춘기 학생이나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의 김혜자 씨처럼 남들은
이해 못 하는 3차원적인 가출. 그렇다면 지금 제가 누리는 자유는 독립이며 해방이자 일종의
가출입니다. 육체적으로 제약에서 벗어난 것은 사실이나 남들에게 마냥 다 이해를 바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하나 더,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제게 자유는 생활이더군요.
‘분명 살긴 살았는데, 산 적이 없었구나.’
비로소 ‘생활’을 하다 보니 참 많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날이 갈수록 또렷하고
선명하게 나 자신을 발견하는 체험은 에디 슬리먼의 패션쇼를 보며 울고 웃었던 감개무량함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사회가 씌운 녹슨 코뚜레를 벗고 보니 오히려 진짜 용기가 생겼습니다.
명함에 기댄 채 뒤로 숨던 그 녀석은 비겁하고 멍청했습니다.
한마디로 내가 누리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이 시간, 전
최대한 깊고 충분히 자유로울 예정입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패션을 찾을 것입니다.
똑같이 살지 마세요. 한국의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자유’는 자유가 아닙니다. 서서히 그 실체가
드러나면서 조금씩 혹은 크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모든 것은 이 거짓말에서부터 시작됐을
겁니다. 미안합니다.
자유를 찾으세요.
여기는 런던입니다.




